해가 바뀔 때마다 한국 사람들이 나누는 덕담은, “복 많이 받으세요”이다. 신정(新正)에도, 설날에도 우리는 그렇게 복(福)을 기원한다. 복은 요즈음 언어로 하면 바로 행복을 뜻한다. 우리 정치권이 새삼 ‘복지’를 들고 나오는 작금의 추세는 한국인의 행복욕구가 그만큼 커지고 있는 추세임을 재빨리 간파했음을 반영한다. 

 물론 우리나라만의 현상이 아니다. 새삼 주목해야 할 것은, 근년들어 선진국들을 중심으로 행복이 학문 영역에서도 본격적으로 다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실제로 미국 하버드대에서 지금 최고의 인기강의 중 하나가‘행복학(science of happiness)’이라고 한다. 영국 프랑스 독일 등 서구 선진 각국의 서점가에서는 행복 관련 책들이 자주 베스트셀러 목록에 들어가고 사원들의 행복증진을 위해 행복 전담부서를 설치하는 회사들도 늘어나고 있다. 

 영국정부는 앞으로 4년간 매년 200만 파운드(310만 달러)를 투자해 ‘행복지수(Happiness Index)’를 개발키로 했다. 프랑스·캐나다 정부도 행복 지수를 개발 중이다. 앞서 2009년 12월에는 100개국이 참가한 국민행복지수(GNH) 국제회의가 브라질에서 개최되기도 했다. 

 국제적인 행복 열풍 속에서 한국의 사정은 어떤가. 격동의 현대사에서 우리는 물질적 풍요를 행복의 척도로 삼아 왔다. 1960년대의 산업화 초기에 80달러 수준이었던 개인당 GDP가 이제는 2만 달러로 250배나 늘어났다. 그러나 경제력으로 세계 10위권인 우리나라 국민 중“행복하다”고 대답한 비율이 세계 최빈국의 하나인 방글라데시 국민의 그것보다 낮다는 조사 결과도 있다. 세계가 감탄하는 우리의 경제적 성과는 지금 자살률 세계 첫째라는, 어두운 현상과 함께 한다. 풍요속의 불행이다.

 긴요한 것은 행복찾기에 대한 우리의 마음가짐이다. 행복은 권리가 아니라 의무라는 견해가 있다. 옳은 판단이라고 생각된다. 권리의 향유는 개인의 선택이지만 의무는 선택일 수가 없다. 반드시 해야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행복이 그렇다. 행복은 권리로서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의무로서 부여받은 것이 인간의 조건임을 인정해야 한다. 

 행복찾기는 어디서부터 출발해야 하는가. 아프리카 오지에서 의료 봉사에 평생을 바친 슈바이쳐 박사의 어록(語錄)에 답이 있다.박사는“진정 행복하려면 남을 섬길 방도를 찾으라”고 일깨웠다. ‘행복학’까지를 애써 공부할 필요도 없이 행복의 길은 그렇게 가까이 열려 있는 셈이다. 섬김은 봉사의 다른 말이다. 봉사가 행복의 필수 요건이라는 뜻이다. 설날 귀성으로 민심 속에 들어갈 정치인들부터 이를 깊이 깨달았으면 좋겠다.
Posted by 평화행동
 2011년은 21세기의 새로운 10년이 시작되는 해 입니다. 세계가 찬연한 희망으로 새 밀레니엄의 개막에 환호했던 것처럼 2011년을 맞으면서도 그런 희망을 결코 접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지난 10년 동안의 격동을 경험한 우리로서는 새해를 맞으면서 새 희망을 기약하는 한편으로 앞날에 대한 우려 역시 떨치기 어렵습니다. 지금도 해결해야 할 과제가 산적해 있을 뿐 아니라 앞으로의 10년 동안 헤쳐가야 할 앞길 또한 여전히 험로(險路)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역사에는‘불가사의(不可思議:mysterious)한 사이클’이 되풀이 된다”고 했습니다. 2차 세계대전의 기운이 감돌던 때인 1936년, 미국 루즈벨트 대통령이 민주당 대선후보 재지명을 수락하면서 행한 연설의 한 구절입니다. 어쩌면 21세기의 두번째 10년으로 접어드는 2011년은 역사의 불가사의한 사이클에서 하나의 중요한 변곡점이 될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오늘의 세계조류가 그런 예감을 불러 옵니다.

 지금 유럽권 일부 국가들이 직면하고 있는 금융위기와 그것으로 빚어지고 있는 혼란은 미국에서 촉발된 국제 금융위기가 단시일 내에 벗어날 수 없는 재앙임을 거듭 확인시켜 주고 있습니다. 세계 경제의 봄은 아직 멀었다는 것입니다. 세계 도처에 위험 요소들이 잠복해 있습니다. 새 밀레니엄 초기의 9·11테러로 입증된 국제테러의 위험은 아직도 언제 어디서 어떤 형태로 폭발할지모르는 상태 그대로 입니다. 자원 확보를 위한 선진국들의 경쟁은 말 그대로 총성 없는 전쟁이나 다름없습니다. 우리의 국가적 이해와 직결되는 동북아 정세는 주변 강국들의 외교적 각축이 20세기 초입의 상황을 상기하게 합니다. 남북 관계 역시 2010년에 경험했던대로 긴장의 도를 높여가고만 있습니다. 말하자면 21세기의 10년을 지나고도 세계는 여전히 상쟁(相爭)의 시대를 청산하지 못한 것입니다. 

 국내 상황만 국한해 보아도 상쟁은 도처에서 쉬임없이 전개되고 있습니다. 정치권이 대표적인 현장입니다. 얼마 전 예산국회에서는 정파 이기주의, 선거구의 표심을 의식한 정치인 개개인의 탐욕이 국민 앞에 맨몸으로 노출되었습니다. 예산날치기를 감행한 여당이나 거리에 나와 시위하는 야당이나 모두 지난 날보다도 오히려 더 상쟁의 정치에 함몰돼 가고 있는 형국입니다.

 우리가 새해를 맞으면서 무엇보다 먼저 경계해야 할 것은 상생(相生)의 시대를 열지 않으면 앞으로 더욱 극렬한 상쟁의 시대가 전개될지 모른다는 사실입니다. 이제 말이 아닌 실천으로 상생의 길을 찾아야 하고 그 일은 소통에서 시작된다는 것을 공동체 구성원이 절실하게 자각해야 합니다. 

 상생과 상쟁, 소통과 불통은 각각 글자 한자씩 차이일 뿐입니다. 이는 상생도, 소통도 어려운 일이 아님을 뜻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상생의 시대 를 열어 가기 위해‘소통사회’를 만들어갈 것인가. 불통 상태로 상쟁을 지속할 것인가. 그것이 2011년 새해 아침에 우리에게 주어진 첫 번째 국가·사회적 과제입니다.

 과제의 해답은 간명합니다. 소통을 통한 상생의 나라 만들기를 국정의 기조로 삼아야 합니다. 정치권부터 소통하는 여야관계를 통해 상생의 정치를 국민 앞에 분명하게 보여 주어야 합니다. 무엇보다 먼저 정치 리더십이 그렇게 변해야만 2011년의 두 번째 10년 동안에 우리가 염원하는 선진국 진입과 통일의 꿈을 성취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반드시 상생의 시대를 열어가도록 하겠다는 소명감으로 2011년의 새 아침을 맞이합니다.
Posted by 평화행동
송년칼럼
다시 송년의 달 12월을 맞으면서 지난 1년을 성찰해 보면 2010은 어느 해보다도 희망과 불안이 극명하게 교차한 해였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국내 상황이나 우리를 둘러싼 주변 정세 등이 모두 그러했습니다.
희망은 무엇보다 G20의 개최와 원조 공여국이 됐다는 사실을 통해 확인됐습니다. 88서울 올림픽 이후 가장 크게 세계의 주목을 받은 G20 회의를 의장국으로서 성공적으로 주관했다는 것은 한국이 국제 사회의 주변부에서 당당한 중심국으로 편입됐다는 증거가 아닐 수 없습니다. 반세기도 안 되는 짧은 기간에 원조 받는 나라에서 원조 하는 나라로 도약함으로써 선진국 진입을 위한 또 하나의 기본 자격도 갖추게 됐습니다.
세계적 금융위기의 터널에서 한국이 가장확실하고 빠르게 빠져나왔다는 평가도 있습니다. 아직 마음을 놓을 상황이 아니라 하더라도 성장율-수출규모 등 지표상으로는 분명 한국 경제의 지난 한해는 희망의 빛이 밝은 편이었습니다. 그러나 빛은 필연적으로 그늘을 드리운다는 것을 증명하듯 우리가 한 해 동안 체감한 불안의 그림자도 간과할 수 없을 만큼 짙었습니다.
천안함 비극, 연평도 포격은 이 땅에 아직도 전쟁의 위험이 상존한다는 분단현실을엄혹하게 일깨웠습니다. 우리의 근본적 불안은 그와 같은 비극이 언제 어떻게 재발할지 모른다는 우려에서 연유 합니다. 경제-사회적 측면에서도 불안은 여전합니다. 날이 갈수록 빈부 격차가 커지고 있습니다. 중산층은 점차 무너져 가고 이에 비례해서 한가닥 희망도 없이 빈곤층으로 전락하는 인구가 늘어갈 뿐 아니라 실업 청년들의 좌절감과 분노는 심화되고 있습니다.
2010년은 주변국들의 외교적 각축 양상이 어느 해 보다도 두드러진 한해였습니다. 경제적 이해와 영토 문제를 놓고 미국과 중국, 그리고 일본과 중국 및 러시아가 벌이는 외교적 각축은 100년 전 망국시기에 한반도를 둘러쌓고 빚어졌던 열강의 패권다툼을 어쩔수 없이 상기토록 합니다. 더욱 걱정되는 것은, 이 나라들의 불편한 관계가 빠른 시일 안에 개선될 기미도 보이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여기에 더해 중국의 대북혈맹(血盟)강조, 6/25 의미의 왜곡 발언등이 나왔습니다. 이는 우리와 북한을 상대하는 중국의 전략이 한반도 통일에 장애가 될 수 있음을 강하게 시사합니다.
국내외 상황이 이처럼 엄중한데도 나라를 이끌어야 할 정치는 오히려 뒷걸음입니다. 청문회에서 여실히 확인되었듯이 지도층의 도덕적 타락 역시 근본적 치유의 길이 과연 있는가를 회의하게 할 정도입니다. 해를 마감하는 시점에서도 우리의 불안이 가시지 않는 까닭은 바로 그 때문이기도 합니다.
새삼 되돌아보면 2010년은 역사의 연표(年表)만으로도 우리에게 참으로 각별한 해였습니다. 21세기의 첫 10년이면서 망국 100년, 동족상잔의 전쟁 발발 50년, 경부 고속도로 개통으로 상징되는 산업화의 본격시동 40년, 민주화의 뼈아픈 진통이었던 광주의 비극 30년인 해였습니다. 이처럼 각별했던 2010년을 마감하면서 우리가 거듭 확인해야 하는 것은, 경제적 성취만으로는 진정한 강대국이 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이제 우리는 문화 대국- 윤리도덕의 강국을 만들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반드시 소통과 나눔이 일상화되는 사회로 가야 합니다.
지난 1년 동안 드러난 북한의 여러 정황들은 통일의 기반을 실질적으로 구축해야 할때임을 일깨웁니다. 본격적으로 통일을 준비해야 할 시점이라는 의미입니다. 우리가 지향해야 할 이 모든 목표는 결국 정치적 리더십의 선진화 여부에달려 있습니다. 지금 한국 사회에서 정치 리더십의 선진화야 말로 가장 확실한 희망의 약속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가 오는 2011년을 희망의 해로 만들어야 할 막중한 책임을 분담하고 있음을 깊이 인식하면서 2010년 한해를 마감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Posted by 평화행동

  “나는 지하에서 신과 악마와 함께 했다. 신이 나를 선택했다”- 지하 700미터의 갱도에 갇혀 있다가 69일 만에 두 번째로 구출된 ‘칠레 광부’가 세상에 나와 토로한 첫 환호성이다. 어느 목회자의 설교나 어떤 신앙인의 간증보다도 훨씬 더 강렬하고 감동적인 ‘복음’으로 들린다. 극한의 절망을 체험한 사람만이 전할 수 있는 희망의 메시지인 셈이다.

   칠레 광부가 전한 이 메시지 속의 신과 악마는 반드시 종교적 의미만이 아니라 고난의 상황을 견디어 낸 자기의지의 다른 표현으로도 받아들여진다. 따라서 그의 말을 변용(變容)하면 이렇게 이해된다. “나는 지하에서 희망과 절망과 함께 했다. 희망이 나를 구했다.”

   지하 갱도뿐인가. 지상에도 그런 지역이 있다. 2천3백만 여명의 사람이 사는 북한 땅이다. 북한 동포들은 지금 하루하루 희망과 절망이 함께 하는 ‘지하의 삶’을 이어가는 거나 다름없는 상태다. 그들을 어떻게 구출해야 하는가.

   대북지원은 지금 첨예한 정치-정책-사회적 논란거리다. 무엇을 어떻게 지원하든 간에 그것들은 결국 북한 정권의 핵무장을 도와 줄 뿐이라는 논리가 있다. 지원은 하되 북한동포에게 물품이 제대로 전달되는가를 확인 할 수 있어야 한다는 의견도 제기된다. 굶주리는 북한동포들의 참상을 더 이상 방치 할 수 없음으로 쌀 등 생필품은 서둘러 보내야 한다는 주장도 설득력 있게 들려온다.

   무엇이 정답인가. ‘밥이 사랑’이라는 잠언의 함의(含意)는 밥이야 말로 사람이 생존권을 확보하기 위한 절대적 기본요건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정부 정책으로서가 아니라 개인과 사회단체의 정성을 모아 기아 상태의 북한동포들이 밥만은 먹을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야말로 이 시대에 우리가 해야 할 인간으로서의 도리다. ‘평화의 쌀 보내기는 바로 그런 도리의 구체적 실천이다.

   칠레광부들은 캄캄한 지하에서 이틀에 과자 반쪽·참치통조림 두 숟가락· 유유 반컵씩으로 버티었다고 한다. 상징비유로 파악하면 북한동포들의 삶도 대부분 그런 지경이다.

   칠레광부들은 매몰 후 17일 만에 뚫린 직경 12센티의 암반구멍을 통해 구호물품이 들어오면서 부터 살아나갈 수 있다는 희망을 일구었다. 북한동포들도 훗날 “희망이 우리를 구했다”고 말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평화의 쌀 보내기는 북한동포들을 향해 ‘생존구멍’을 뚫는 운동이고 그것을 통해 전달되는 쌀은 그들에게 희망을 키우는 자양(滋養)이 될 터이다. 사회 각계각층의 적극적인 호응을 기대한다.

Posted by 평화행동
이전버튼 1 이전버튼

티스토리 툴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