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는 해양시대라고 한다. 실제로 바다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이 어느 때 보다도 높아지고 있는 추세다. 육지자원의 고갈우려까지 제기되는 상황에서 자원보고인 바다야 말로 인류에게 새로운 희망의 공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다가 자원으로서만 인류에게 희망을 주는 게 아니라는 사실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옛말에 ‘海納百川有容乃大’(해납백천 유용내대: 바다는 청탁을 가리지 않고 모든 물을 받아들이기에 그 너그러움으로 드넓다)라고 했다. 바다는, 그처럼 포용·평화의 상징이기도 하다. 지구촌의 75%에 이르는 바다는 영해라는 개념이 있긴 하지만 인류 모두가 공유하는, 아니 공유해야 하는 공간인 것이다.


역사의 격랑으로 땅은 분단되었으나 3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한반도에서 해양의 중요성이 강조되어 온지는 오래다. 일찍이 육당 최남선도‘해상대한사(海上大韓史)’라는 긴 논문을 통해 한반도가 대륙문명과 해양 문명이 합류하는 요충임을 설파하고 ‘해양입국’을 통해 나라의 발전을 도모하자고 했다. 육당의 그와 같은 주창은, 그의 친일 행적에 대한 논란에도 불구하고 탁월한 선견(先見)이 아닐 수 없다.


때마침 얼마 전 전남 여수에서 한척의 배가 진수했다. 전장 15, 전폭 4.4미터, 19톤에 정원이 17명임으로 그다지 큰 배가 아니다. 그러나 이 배의 첫 출항은 그 의미가 각별하다. 주목되는 것은 두 가지다. 선박 건조기술과 해양레저에서 이 배의 효용성이다. 건조기술로는 세계 최초다. 수지형 석고몰드 공법이라는 신기술로 만들어졌다. 조선수주 물량에서 세계 최고인 한국이 거둔 또 하나의 기술적 개가이다. 따라서 이 배의 향후 효용성도 충분히 기대할 만하다.


선진국의 선례(先例)에서 보듯이 국민 소득 2만 달러에 이르면 해양레저가 보편화되기 시작한다. 해양레저를 확산시키자는 것은, 크게 보면 인류를 위한 휴식과 놀이의 공간으로서도 바다를 폭넓게 활용하자는 뜻이 된다. 우리나라의 경우도 특수층만 향유하는 것으로 이해돼 왔던 요트 이용 해양레저를 이제 대중화해야 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신기술 신공법으로 건조된 작은 배-크루저 요트의 힘찬 출항은 그런 날이 가까워지고 있음을 예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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텃밭이 국제적 화제가 된 적이 있다. 지난달 오바마·후진타오 회동 때의 일이다. 두 강대국 지도자의 만찬에 나온 샐러드 재료가 모두 백악관의 30여평 텃밭에서 재배된 야채였다는 것이다. 그런데 텃밭 경작의 ‘원조’라고 할 수 있는 한반도에서는 지금 남북 사이에 그것의 개념뿐 아니라 생활 속에 차지하는 중요도가 완전히 달라졌다.


주민들의 생존 실상이 농경시대만도 못한 지경에 이른 북한에서 지금 텃밭은 유일한 자본주의적 영농 현장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가구별 텃밭에서 생산하는 야채가 ‘장마당’에서 거래되는 중요 품목이기 때문이다. 배급이 사실상 끊겨버린 상황에서 가구마다 장마당경제에 기대어 겨우 생존을 영위하고 있다는 소문이 사실이라면 북한 동포들에게 텃밭은 날로 더 소중해 지는 생존의 터전이다.


그러나 자유민주주의체제의 자본주의 나라 한국사회에서는 이제 생존을 위한 경작지로서의 텃밭은 사실상 사라졌다. 도시에서 태어나 아파트에서 성장한 세대는 텃밭의 모양조차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 텃밭 상실의 시대인 셈인데, 오직 정치영역에서만은 텃밭이라는 말이 일상용어로 자리 잡았다.


정치권에서 텃밭은 바로 정당별 지지기반으로서의 지역을 말한다. 어느 정당은 영남이 텃밭이고 어느 정당은 호남이 텃밭이라는 식이다. 말하자면 ‘정당텃밭’인 셈이다. 문제는 망국적 지역 갈등이 바로 이 정당텃밭에서 나와 번졌다는 점이다.


이 제 정치권에서 쓰이는 텃밭은 이름도, 주인도 바꾸어야 한다. 바로 ‘자치(自治)텃밭’이다. 정당별 지지기반으로서의 정당텃밭이 아니라 진정으로 유권자가 자기 권익을 지키고 키워 갈 수 있는 정치터전이 바로 ‘자치텃밭’이다. 정치의 변화는 거기에서 싹튼다.


실 제로 일본에서는 그런 조짐이 본격화되고 있다. 소규모 지역정당이 주민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고 있는 것이다. 얼마 전 실시된 나고야 시와 아이치 현 지방자치단체장 선거에서 지역정당 후보들이 집권당인 민주당과 제1야당인 자민당 등 거대 정당 후보를 압도적 표차로 이기고 당선됐다. 그들이 간판으로 내세운 정당 이름도 정치적 지향 목표를 구체적으로 확인시켜 준다. ‘감세(減稅)일본’ ‘일본 제일아이치회’가 정당명이다. 민주 자유 등 거창하지만 추상적인 이념을 내건 정당명이 아니다. 일본 정치가 자치텃밭을 변화의 발판으로 삼아 가고 있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왜 이런 변화가 오고 있는가. “기존 정치의 구태에 신물이 난 지방유권자의 반란”이라는 일본 언론들의 평가가 변화의 배경을 잘 설명해 준다. 구태 정치에 신물 나기는 한국 유권자가 일본 유권자들보다 더하면 더했지 결코 덜하지 않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한국 정치의 변화도 거역할 수 없는 시대적 추세가 될 것이다.


지금까지 한국 정치에서는 특정 정당이 특정 지역을 정치적으로 점유하고 있는 거나 다름없다. 몇 개 정당이 정치적 영농지를 분할해서 차지하고 있는 꼴인데도 선거철만 되면 정치인들은 주민의 머슴임을 강조한다. 하지만 그들의 소속 정당은 특정 지역별로 사실상 정치적 대지주로서 행세해 왔다. 그 정치 영농지를 자치텃밭으로 세분해서 영농권과 소출을 전부 주민에게 돌려주어야 한다.


한국의 현행 정당법은 당을 창당하려면 5개 이상의 시·도당을 두도록 규정하고 있다. 지역주의 정당을 극복하기 위해서라지만 오히려 정치적 지역 분할을 심화시켜 왔을 뿐이다. 정당텃밭을 갈아엎고 자치텃밭으로 가꾸어 가기 위해서는 먼저 정당 창당 요건의 개선을 강구할 필요가 있다. 지역주의의 청산을 위해서도 이는 긴요하다. 때마침 고향집 텃밭에 새싹이 돋아날 새봄도 머지않았다.


황선조 평화행동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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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가 바뀔 때마다 한국 사람들이 나누는 덕담은, “복 많이 받으세요”이다. 신정(新正)에도, 설날에도 우리는 그렇게 복(福)을 기원한다. 복은 요즈음 언어로 하면 바로 행복을 뜻한다. 우리 정치권이 새삼 ‘복지’를 들고 나오는 작금의 추세는 한국인의 행복욕구가 그만큼 커지고 있는 추세임을 재빨리 간파했음을 반영한다. 

 물론 우리나라만의 현상이 아니다. 새삼 주목해야 할 것은, 근년들어 선진국들을 중심으로 행복이 학문 영역에서도 본격적으로 다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실제로 미국 하버드대에서 지금 최고의 인기강의 중 하나가‘행복학(science of happiness)’이라고 한다. 영국 프랑스 독일 등 서구 선진 각국의 서점가에서는 행복 관련 책들이 자주 베스트셀러 목록에 들어가고 사원들의 행복증진을 위해 행복 전담부서를 설치하는 회사들도 늘어나고 있다. 

 영국정부는 앞으로 4년간 매년 200만 파운드(310만 달러)를 투자해 ‘행복지수(Happiness Index)’를 개발키로 했다. 프랑스·캐나다 정부도 행복 지수를 개발 중이다. 앞서 2009년 12월에는 100개국이 참가한 국민행복지수(GNH) 국제회의가 브라질에서 개최되기도 했다. 

 국제적인 행복 열풍 속에서 한국의 사정은 어떤가. 격동의 현대사에서 우리는 물질적 풍요를 행복의 척도로 삼아 왔다. 1960년대의 산업화 초기에 80달러 수준이었던 개인당 GDP가 이제는 2만 달러로 250배나 늘어났다. 그러나 경제력으로 세계 10위권인 우리나라 국민 중“행복하다”고 대답한 비율이 세계 최빈국의 하나인 방글라데시 국민의 그것보다 낮다는 조사 결과도 있다. 세계가 감탄하는 우리의 경제적 성과는 지금 자살률 세계 첫째라는, 어두운 현상과 함께 한다. 풍요속의 불행이다.

 긴요한 것은 행복찾기에 대한 우리의 마음가짐이다. 행복은 권리가 아니라 의무라는 견해가 있다. 옳은 판단이라고 생각된다. 권리의 향유는 개인의 선택이지만 의무는 선택일 수가 없다. 반드시 해야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행복이 그렇다. 행복은 권리로서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의무로서 부여받은 것이 인간의 조건임을 인정해야 한다. 

 행복찾기는 어디서부터 출발해야 하는가. 아프리카 오지에서 의료 봉사에 평생을 바친 슈바이쳐 박사의 어록(語錄)에 답이 있다.박사는“진정 행복하려면 남을 섬길 방도를 찾으라”고 일깨웠다. ‘행복학’까지를 애써 공부할 필요도 없이 행복의 길은 그렇게 가까이 열려 있는 셈이다. 섬김은 봉사의 다른 말이다. 봉사가 행복의 필수 요건이라는 뜻이다. 설날 귀성으로 민심 속에 들어갈 정치인들부터 이를 깊이 깨달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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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1년은 21세기의 새로운 10년이 시작되는 해 입니다. 세계가 찬연한 희망으로 새 밀레니엄의 개막에 환호했던 것처럼 2011년을 맞으면서도 그런 희망을 결코 접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지난 10년 동안의 격동을 경험한 우리로서는 새해를 맞으면서 새 희망을 기약하는 한편으로 앞날에 대한 우려 역시 떨치기 어렵습니다. 지금도 해결해야 할 과제가 산적해 있을 뿐 아니라 앞으로의 10년 동안 헤쳐가야 할 앞길 또한 여전히 험로(險路)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역사에는‘불가사의(不可思議:mysterious)한 사이클’이 되풀이 된다”고 했습니다. 2차 세계대전의 기운이 감돌던 때인 1936년, 미국 루즈벨트 대통령이 민주당 대선후보 재지명을 수락하면서 행한 연설의 한 구절입니다. 어쩌면 21세기의 두번째 10년으로 접어드는 2011년은 역사의 불가사의한 사이클에서 하나의 중요한 변곡점이 될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오늘의 세계조류가 그런 예감을 불러 옵니다.

 지금 유럽권 일부 국가들이 직면하고 있는 금융위기와 그것으로 빚어지고 있는 혼란은 미국에서 촉발된 국제 금융위기가 단시일 내에 벗어날 수 없는 재앙임을 거듭 확인시켜 주고 있습니다. 세계 경제의 봄은 아직 멀었다는 것입니다. 세계 도처에 위험 요소들이 잠복해 있습니다. 새 밀레니엄 초기의 9·11테러로 입증된 국제테러의 위험은 아직도 언제 어디서 어떤 형태로 폭발할지모르는 상태 그대로 입니다. 자원 확보를 위한 선진국들의 경쟁은 말 그대로 총성 없는 전쟁이나 다름없습니다. 우리의 국가적 이해와 직결되는 동북아 정세는 주변 강국들의 외교적 각축이 20세기 초입의 상황을 상기하게 합니다. 남북 관계 역시 2010년에 경험했던대로 긴장의 도를 높여가고만 있습니다. 말하자면 21세기의 10년을 지나고도 세계는 여전히 상쟁(相爭)의 시대를 청산하지 못한 것입니다. 

 국내 상황만 국한해 보아도 상쟁은 도처에서 쉬임없이 전개되고 있습니다. 정치권이 대표적인 현장입니다. 얼마 전 예산국회에서는 정파 이기주의, 선거구의 표심을 의식한 정치인 개개인의 탐욕이 국민 앞에 맨몸으로 노출되었습니다. 예산날치기를 감행한 여당이나 거리에 나와 시위하는 야당이나 모두 지난 날보다도 오히려 더 상쟁의 정치에 함몰돼 가고 있는 형국입니다.

 우리가 새해를 맞으면서 무엇보다 먼저 경계해야 할 것은 상생(相生)의 시대를 열지 않으면 앞으로 더욱 극렬한 상쟁의 시대가 전개될지 모른다는 사실입니다. 이제 말이 아닌 실천으로 상생의 길을 찾아야 하고 그 일은 소통에서 시작된다는 것을 공동체 구성원이 절실하게 자각해야 합니다. 

 상생과 상쟁, 소통과 불통은 각각 글자 한자씩 차이일 뿐입니다. 이는 상생도, 소통도 어려운 일이 아님을 뜻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상생의 시대 를 열어 가기 위해‘소통사회’를 만들어갈 것인가. 불통 상태로 상쟁을 지속할 것인가. 그것이 2011년 새해 아침에 우리에게 주어진 첫 번째 국가·사회적 과제입니다.

 과제의 해답은 간명합니다. 소통을 통한 상생의 나라 만들기를 국정의 기조로 삼아야 합니다. 정치권부터 소통하는 여야관계를 통해 상생의 정치를 국민 앞에 분명하게 보여 주어야 합니다. 무엇보다 먼저 정치 리더십이 그렇게 변해야만 2011년의 두 번째 10년 동안에 우리가 염원하는 선진국 진입과 통일의 꿈을 성취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반드시 상생의 시대를 열어가도록 하겠다는 소명감으로 2011년의 새 아침을 맞이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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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년칼럼
다시 송년의 달 12월을 맞으면서 지난 1년을 성찰해 보면 2010은 어느 해보다도 희망과 불안이 극명하게 교차한 해였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국내 상황이나 우리를 둘러싼 주변 정세 등이 모두 그러했습니다.
희망은 무엇보다 G20의 개최와 원조 공여국이 됐다는 사실을 통해 확인됐습니다. 88서울 올림픽 이후 가장 크게 세계의 주목을 받은 G20 회의를 의장국으로서 성공적으로 주관했다는 것은 한국이 국제 사회의 주변부에서 당당한 중심국으로 편입됐다는 증거가 아닐 수 없습니다. 반세기도 안 되는 짧은 기간에 원조 받는 나라에서 원조 하는 나라로 도약함으로써 선진국 진입을 위한 또 하나의 기본 자격도 갖추게 됐습니다.
세계적 금융위기의 터널에서 한국이 가장확실하고 빠르게 빠져나왔다는 평가도 있습니다. 아직 마음을 놓을 상황이 아니라 하더라도 성장율-수출규모 등 지표상으로는 분명 한국 경제의 지난 한해는 희망의 빛이 밝은 편이었습니다. 그러나 빛은 필연적으로 그늘을 드리운다는 것을 증명하듯 우리가 한 해 동안 체감한 불안의 그림자도 간과할 수 없을 만큼 짙었습니다.
천안함 비극, 연평도 포격은 이 땅에 아직도 전쟁의 위험이 상존한다는 분단현실을엄혹하게 일깨웠습니다. 우리의 근본적 불안은 그와 같은 비극이 언제 어떻게 재발할지 모른다는 우려에서 연유 합니다. 경제-사회적 측면에서도 불안은 여전합니다. 날이 갈수록 빈부 격차가 커지고 있습니다. 중산층은 점차 무너져 가고 이에 비례해서 한가닥 희망도 없이 빈곤층으로 전락하는 인구가 늘어갈 뿐 아니라 실업 청년들의 좌절감과 분노는 심화되고 있습니다.
2010년은 주변국들의 외교적 각축 양상이 어느 해 보다도 두드러진 한해였습니다. 경제적 이해와 영토 문제를 놓고 미국과 중국, 그리고 일본과 중국 및 러시아가 벌이는 외교적 각축은 100년 전 망국시기에 한반도를 둘러쌓고 빚어졌던 열강의 패권다툼을 어쩔수 없이 상기토록 합니다. 더욱 걱정되는 것은, 이 나라들의 불편한 관계가 빠른 시일 안에 개선될 기미도 보이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여기에 더해 중국의 대북혈맹(血盟)강조, 6/25 의미의 왜곡 발언등이 나왔습니다. 이는 우리와 북한을 상대하는 중국의 전략이 한반도 통일에 장애가 될 수 있음을 강하게 시사합니다.
국내외 상황이 이처럼 엄중한데도 나라를 이끌어야 할 정치는 오히려 뒷걸음입니다. 청문회에서 여실히 확인되었듯이 지도층의 도덕적 타락 역시 근본적 치유의 길이 과연 있는가를 회의하게 할 정도입니다. 해를 마감하는 시점에서도 우리의 불안이 가시지 않는 까닭은 바로 그 때문이기도 합니다.
새삼 되돌아보면 2010년은 역사의 연표(年表)만으로도 우리에게 참으로 각별한 해였습니다. 21세기의 첫 10년이면서 망국 100년, 동족상잔의 전쟁 발발 50년, 경부 고속도로 개통으로 상징되는 산업화의 본격시동 40년, 민주화의 뼈아픈 진통이었던 광주의 비극 30년인 해였습니다. 이처럼 각별했던 2010년을 마감하면서 우리가 거듭 확인해야 하는 것은, 경제적 성취만으로는 진정한 강대국이 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이제 우리는 문화 대국- 윤리도덕의 강국을 만들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반드시 소통과 나눔이 일상화되는 사회로 가야 합니다.
지난 1년 동안 드러난 북한의 여러 정황들은 통일의 기반을 실질적으로 구축해야 할때임을 일깨웁니다. 본격적으로 통일을 준비해야 할 시점이라는 의미입니다. 우리가 지향해야 할 이 모든 목표는 결국 정치적 리더십의 선진화 여부에달려 있습니다. 지금 한국 사회에서 정치 리더십의 선진화야 말로 가장 확실한 희망의 약속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가 오는 2011년을 희망의 해로 만들어야 할 막중한 책임을 분담하고 있음을 깊이 인식하면서 2010년 한해를 마감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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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지하에서 신과 악마와 함께 했다. 신이 나를 선택했다”- 지하 700미터의 갱도에 갇혀 있다가 69일 만에 두 번째로 구출된 ‘칠레 광부’가 세상에 나와 토로한 첫 환호성이다. 어느 목회자의 설교나 어떤 신앙인의 간증보다도 훨씬 더 강렬하고 감동적인 ‘복음’으로 들린다. 극한의 절망을 체험한 사람만이 전할 수 있는 희망의 메시지인 셈이다.

   칠레 광부가 전한 이 메시지 속의 신과 악마는 반드시 종교적 의미만이 아니라 고난의 상황을 견디어 낸 자기의지의 다른 표현으로도 받아들여진다. 따라서 그의 말을 변용(變容)하면 이렇게 이해된다. “나는 지하에서 희망과 절망과 함께 했다. 희망이 나를 구했다.”

   지하 갱도뿐인가. 지상에도 그런 지역이 있다. 2천3백만 여명의 사람이 사는 북한 땅이다. 북한 동포들은 지금 하루하루 희망과 절망이 함께 하는 ‘지하의 삶’을 이어가는 거나 다름없는 상태다. 그들을 어떻게 구출해야 하는가.

   대북지원은 지금 첨예한 정치-정책-사회적 논란거리다. 무엇을 어떻게 지원하든 간에 그것들은 결국 북한 정권의 핵무장을 도와 줄 뿐이라는 논리가 있다. 지원은 하되 북한동포에게 물품이 제대로 전달되는가를 확인 할 수 있어야 한다는 의견도 제기된다. 굶주리는 북한동포들의 참상을 더 이상 방치 할 수 없음으로 쌀 등 생필품은 서둘러 보내야 한다는 주장도 설득력 있게 들려온다.

   무엇이 정답인가. ‘밥이 사랑’이라는 잠언의 함의(含意)는 밥이야 말로 사람이 생존권을 확보하기 위한 절대적 기본요건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정부 정책으로서가 아니라 개인과 사회단체의 정성을 모아 기아 상태의 북한동포들이 밥만은 먹을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야말로 이 시대에 우리가 해야 할 인간으로서의 도리다. ‘평화의 쌀 보내기는 바로 그런 도리의 구체적 실천이다.

   칠레광부들은 캄캄한 지하에서 이틀에 과자 반쪽·참치통조림 두 숟가락· 유유 반컵씩으로 버티었다고 한다. 상징비유로 파악하면 북한동포들의 삶도 대부분 그런 지경이다.

   칠레광부들은 매몰 후 17일 만에 뚫린 직경 12센티의 암반구멍을 통해 구호물품이 들어오면서 부터 살아나갈 수 있다는 희망을 일구었다. 북한동포들도 훗날 “희망이 우리를 구했다”고 말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평화의 쌀 보내기는 북한동포들을 향해 ‘생존구멍’을 뚫는 운동이고 그것을 통해 전달되는 쌀은 그들에게 희망을 키우는 자양(滋養)이 될 터이다. 사회 각계각층의 적극적인 호응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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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절 때의 귀성은 단순히 고향을 찾는 다는 것 이상의 의미가 있다. 귀성은, 엄밀히 성찰해 보면 스스로 종족(宗族)의 일원임을 확인하게 되는 기회다.

실제로 우리는 귀성해서 조상 산소에 성묘하고 고향에 남아 있는 집안 어르신 등 일가친척들을 찾아 인사를 나눈다. 그것이야 말로 우리가 바쁜 일상에서 거의 잊고 지냈던, 종족이라는 공동체의 실체를 한 때나마 새삼 감지할 수 있게 되는 전통의례(儀禮)의 하나다.

종족은 역사적으로 가장 끈끈하게 맺어진 공동체 단위였다. 종가(宗家)- 종문(宗門)-종친(宗親)-종씨(宗氏) 등은, 말하자면 종족 공동체의 결속을 상징하는 말이다.

우리 조상들은 종족의 전통을 통해 삶의 규범과 덕목을 배워왔다. 지금 우리 사회가 시급히 치유해야 할 제반 사회적 병리(病理)는 바로 그와 같은 종족전통의 상실로 초래된 결과가 아닌가 싶다.

물론 시대는 변했다. 종족전통을 삶의 가치로 고수하고 종족의 결속을 옛날처럼 유지하기에는 현대사회는 너무나 복잡다기하다. 그러나 바로 시대상이 그렇기 때문에 종족의 소중함은 오히려 더해진다.

다문화 시대다. 우리나라의 경우 다문화 가정이 어느 나라에서 보다 빠르게 확산되고 있다.

자살율- 이혼율은 제일 높고 출산율은 가장 낮은 상황에서 다문화 가정은 날로 증가 한다. 순혈주의를 기반으로 했던 전통적 종족구성이 필연적으로 초인종-초국가- 초종교의 양상으로 개편돼 갈 수밖에 없음을 말해 주는 현상이다.

현재 우리나라에 거주하는 외국인은 1백 20만여명이다. 한국인과 결혼해서 살고 있는 남녀만도 18만여명에 이르고 그 가운데 베트
남 등 주로 동남아 개발도상국 출신으로 한국에서 시부모를 모시며 가정을 꾸려가는 여성들이 가장 많다. 이들이야 말로 한국 사회에서 종족 공동체 구성의 세계화에 핵심적 존재라는 상징성을 지닌다.

대부분 한자 사용권인 아시아 각국은 공유하는 세시(歲時)풍속도 적지 않다. 추석명절도 그 가운데 하나다. 이를 감안할 때 동남아 출신 결혼이민 여성들의 경우 명절에 평소보다 오히려 더욱 짙은 향수에 잠기게 될 지도 모른다. 추석과 같은 명절 때일수록 이들에 대한 사회전체의 관심과 함께 이웃의 온정이 요구되는 이유다. 그들이 긍지를 갖고 진정으로 한국의 종족에 귀속토록 하는 일이야 말로 이 시대의 국민적 책무라는 생각을 추석에 즈음해서 거듭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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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 낮추기 정치’의 안팎

‘몸 낮추기’가 정치권에서 유행이다. 지난 7/28 보궐선거 이후부터 드러나고 있는 현상이다. 이를 뚜렷하게 알려주는 사진 한 장이 얼마 전 신문에 대문짝만하게 실렸다. 여권 실세 한명이 선거에서 승리하고 당사를 찾아와 어느 최고위원과 인사를 나누는데 서로 머리가 땅에 닿을 정도였다. 보는 사람에 따라 일종의 희화(戱畵)로 느낄만한 사진이었다.  

실제로 ‘왕의 남자’로 불릴 정도인 그 여당 정치인은 선거 기간 내내 몸 낮추기 운동을 인상 깊게 시범했다. 권력 실세임에도 불구하고 중앙당의 지원을 거부한 채 요란한 유세도 없이 밤낮을 가리지 않고 낮은 자세로 유권자에게 다가 갔다. 그리고 압승했다.  

반드시 그를 본받아서라고 볼 수는 없겠지만 새 총리 내정자 역시 몸 낮추기 제스처를 보여주었다. 내정자에게 의례적으로 배정되는 승용차를 마다하고 한 급 낮은 차를 주문해서 정부종합 청사에 마련된 총리 내정자 사무실에 첫 출근하는 모습이 보도 됐다.40대의 젊은 총리 내정자가 보여주는 이런 몸 낮추기 자세가 국민의 눈에는 어떻게 비쳐졌을까.  

정치인의 몸 낮추기가 국민을 나라의 주인으로 섬기겠다는 속뜻을 가시적으로 표현하는 행위라면 바람직한 일이다. 하지만 정치권의 돌아가는 모양새를 통해 보면 정치인들의 몸 낮추기에 과연 진정성이 있는가하는 의구심이 가시지 않는다. 지금 여야 없이 드러내 보이고 있는 내부 갈등은 우리 정치의 본질적 생리가 여전히 국민보다도 권력, 민생보다도 계파이익이 먼저라는 사실을 확인시켜 주는 듯싶다. 섬김은 없고 정쟁만 난무하는 꼴이고 보니 몸 낮추기가 그저 보도 사진용이 아닌가하는 생각마저 들 정도다.  

국민은 지난 6/2 지방선거와 7/2 재•보궐 선거를 통해 여야 정치권에 순차적으로 엄중한 경고를 내렸다. 그래서 여당은 지방 선거에 완패하고 나서, 야당은 재•보선에 참패 한 후 각각 패배의 원인을 ‘오만’이라고 자체 진단하고 ‘국민이 무섭다’고 했다.  

양명학(陽明學)의 효시인 중국 명나라 중기의 사상가 왕양명의 어록을 수록한 ‘전습록’傳習錄)에는 이런 경구가 나온다.“인생의 가장 큰 병폐는 오직 傲(오- 거만함)라는 한 글자에 있다”(人生大病 只是一傲字) . 어디 개인의 삶뿐이겠는가. 예나 지금이나 정치 또는 정치인이 가장 경계해야 할 자세는 오만이다. 정치인 개개인이 보여주는 외형적 몸 낮추기보다도 국민과의 소통을 통한 섬김의 정치야 말로 시대적 요구라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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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이 걱정이다’

 “학교는 존재하는데 교육은 실종상태다. 선생님은 있는데 가르침이 없고 학생은 많은데 배움은 태부족이다”- 요즈음 초중고교에서 벌어지고 있는 이런저런 사고 소식을 접하면서 나라 걱정하는 사람들이 떠올리는 생각이다. 더욱 개탄스러운 것은 6․2 지자체 선거결과 교육행정조차도 정치화돼가는 추세라는 점이다.  

실로 교육이 걱정이다. 언론 보도를 통해 보면 교사와 학생의 관계가 실로 파탄지경으로 치닫고 있는 듯싶다. 최근 사례만 보아도 그렇다. 교실에서 휴대폰을 빼앗긴 중학교 학생이 선생님에게 의자를 집어 던진다. 학생을 상습적으로 폭행한 중학교 교사가 결국 직위해제 되는 가하면 고교 교사가 학생들에게 주먹을 휘두르는 장면을 학생이 촬영해 올린 동영상이 인터넷 공간에 떠돈다. 사랑과 존경으로 맺어져야 할 사제(師弟) 관계는 말 그대로 ‘옛날 얘기’가 돼 가고 있는 형국이다. 

실제로 교사가 학생으로부터 폭언․폭행․협박을 당한 경우가 2005년 52건에서 2009년에는 108건으로 두 배 이상 늘었다.(한국교총의 교사상담 사례 조사).문제가 될 정도의 학생체벌 역시 끊이지 않는다. '참교육을 위한 전국학부모회'가 2008~09년 학부모를 상담한 사례를 보면, 전체 1126건 중 교사의 학생에 대한 체벌(110건)과 언어폭력(26건)이 12%(136건)를 차지했다.

교사와 학생 관계만이 아니다. 학생들 사이의 폭력도 늘어만 간다. 학교 폭력 대책자치위원회의 초중고등 학생에 대한 폭력심의 건수는 2005년 2518건에서 2008년 8813건으로 늘었다. 3년 동안 3배 증가한 꼴이다.

 학교가 이처럼 날로 황폐화 되고 있는데도 교육 행정가들은 자신들의 정치적․이념적 성향에 따라 교육문제에 접근하고 이를 고집한다. 그래서 교사평가․ 학력평가 고사․ 무상급식 등의 실시여부, 특목고의 존폐나 교과 운용 방식 등 모든 교육현안을 놓고 시․도 교육감마다 다른 목소리를 낸다. 그 뿐인가. 선거법 위반혐의로 실형 받은 교육감의 선거비용과 관련해서 교육청 산하 교육장 2명이 뇌물 공여협의로 사법처리 되기도 했다. 교육행정에 까지 정치적 이해관계가 작용하고 있다는 방증이다. 선거로 교육감을 결정하는 현행제도에 회의가 제기되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어떻게 해야 하는가.교육의 해법 찾기에서 반드시 전제돼야 할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교육행정에서 정치를 떼어 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교육감 선출방식의 개선이 당장의 과제다. 둘째는 가정교육의 중요성에 대한 참된 인식이다. 가정교육이야 말로 교육의 출발이라는 사회적 공감의 확산이 긴요하다. 정치가 바른 길을 가고 가정마다 사랑으로 충만할 때 학교는 자연스럽게 나라의 희망을 꽃피우는 공간이 된다.

Posted by 평화행동

 새 단체장-지방 의회의원 당선자들에게는 7월 1일 취임과 함께 두 가지 ‘위험’이 기다리고 있다고 해도 결코 지나치지 않다. 공약이행의 압박과 부정부패의 유혹이 그것이다. 행정의 모든 분야가 주민 생활에 상시적으로 직접 연관되는 기초 지자체의 단체장이나 의회의원의 경우는 특히 그렇다.

  선출직 공직자에게는 선거 때 내세운 공약은 재임기간 내내 벗어 버릴 수 없는 짐이 된다. 민주주의가 성숙될수록 그 짐의 무게는 비례해서 무거워지기 마련이다. 이를 감안하면 당선자들이 취임에 앞서 가장 깊이 유념해야 할 것은 앞으로 실행해야 할 공약의 엄중함이다.

  자국민의 기대를 한 몸에 받아 54년만의 정권교체를 이끈 하토야마(鳩山由紀夫) 일본 전 총리는 후텐마의 미군기지 이전 공약을 지키지 못해 취임 7개월만에 자리를 내 놓았다.이는 남의 나라 중앙정치 얘기이긴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지자체 당선자들이 무겁게 받아 들여야 할 타산지석(他山之石)이 아닐 수 없다.

  새삼 지적할 것도 없이 대부분 기초지자체의 재정 자립도는 아직 취약하기 그지없다. 그럼에도 선거 때 후보들 마다 공약으로 내놓은 사업들은 해당 지자체의 재정능력으로는 도저히 감당 할 수 없는 것들도 적지 않다. 중앙정부의 지원 없이는 달성 불가능한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선거를 치르면서 당선자들도 감지했겠지만 시?군?구를 막론하고 후보들의 공약에 대한 유권자의 판정이 점차 냉엄해 지고 있는 추세다. 그만큼 시대가 달라지고 있고 주민의 의식도 놀라울 정도로 높아졌다. 이런 상황에서 공약이행을 제대로 하지 않을 경우 어떻게 되는가. 지자체에 따라 주민 소환제 등 제도적 제어장치의 가동사례가 늘어날게 뻔하다.

  부정부패의 유혹도 그렇다. ‘나만은 예외’라고 자신할 단체장이나 의원들이 얼마나 될지 의심스럽다. 기초단체장이 가진 각종 권한은 주정차 단속에서부터 지역 대형 건설사업 인·허가까지 총 3888개(한국지방행정연구원의 조사)에 이른다는 점이 바로 그와 같은 의구의 근거가 된다. 군수의 경우 대략 500~800명쯤 되는 공무원에 대한 인사권을 갖고 있는 만큼 마음만 먹으면 매관매직도 가능하다. 부정은 권력의 크기에 비례한다는 상식으로 미루어 보면 부정부패의 소지는 널리고 널린 셈이다. 지난 4기 때 100여명 가까운 기초 단체장이 사법 처리됐다는 사실이 이에 대한 실증적 자료다

  선거 때 쓴 돈도 문제다. 당선자의 경우 법정 선거 비용은 국가로부터 되돌려 받기는 하지만 선거자금이 그 법정비용뿐이라고 믿는 사람은 없다. 당선되기까지는 법정 선거자금 말고도 알게 모르게 엄청난 돈이 소요된다는 것이 상식이다. 현실이 이러한데 취임 후 재임기간동안 부정부패의 유혹에서 초연할 수 있겠는가. 참으로 어려운 일일 것이다. 선거에서 ‘당선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라는 지적은 그래서 나온다.

  물론 6/2 선거의 결과를 유심히 분석해 보면 분명히 변화를 전망할 수도 있게 된다. . 무엇보다도, 앞으로 그 활동을 눈여겨 지켜 볼만한 생활인들이 예상보다 훨씬 많이 기초 지자체의 단체장? 의원으로 당선됐다는 사실이 이를 뒷받침한다. 실천 가능한 공약으로 당선한 생활인의 건실한 면면을 통해 작게는 지자체의 바람직한 정착에서 부터 크게는 생활정치의 점진적 구현도 점치게 된다. 공약(空約) 안하는 선거, 부정부패 없는 생활 정치- 이제 비로소 길이 열렸다고 생각한다.

Posted by 평화행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