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가 바뀔 때마다 한국 사람들이 나누는 덕담은, “복 많이 받으세요”이다. 신정(新正)에도, 설날에도 우리는 그렇게 복(福)을 기원한다. 복은 요즈음 언어로 하면 바로 행복을 뜻한다. 우리 정치권이 새삼 ‘복지’를 들고 나오는 작금의 추세는 한국인의 행복욕구가 그만큼 커지고 있는 추세임을 재빨리 간파했음을 반영한다. 

 물론 우리나라만의 현상이 아니다. 새삼 주목해야 할 것은, 근년들어 선진국들을 중심으로 행복이 학문 영역에서도 본격적으로 다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실제로 미국 하버드대에서 지금 최고의 인기강의 중 하나가‘행복학(science of happiness)’이라고 한다. 영국 프랑스 독일 등 서구 선진 각국의 서점가에서는 행복 관련 책들이 자주 베스트셀러 목록에 들어가고 사원들의 행복증진을 위해 행복 전담부서를 설치하는 회사들도 늘어나고 있다. 

 영국정부는 앞으로 4년간 매년 200만 파운드(310만 달러)를 투자해 ‘행복지수(Happiness Index)’를 개발키로 했다. 프랑스·캐나다 정부도 행복 지수를 개발 중이다. 앞서 2009년 12월에는 100개국이 참가한 국민행복지수(GNH) 국제회의가 브라질에서 개최되기도 했다. 

 국제적인 행복 열풍 속에서 한국의 사정은 어떤가. 격동의 현대사에서 우리는 물질적 풍요를 행복의 척도로 삼아 왔다. 1960년대의 산업화 초기에 80달러 수준이었던 개인당 GDP가 이제는 2만 달러로 250배나 늘어났다. 그러나 경제력으로 세계 10위권인 우리나라 국민 중“행복하다”고 대답한 비율이 세계 최빈국의 하나인 방글라데시 국민의 그것보다 낮다는 조사 결과도 있다. 세계가 감탄하는 우리의 경제적 성과는 지금 자살률 세계 첫째라는, 어두운 현상과 함께 한다. 풍요속의 불행이다.

 긴요한 것은 행복찾기에 대한 우리의 마음가짐이다. 행복은 권리가 아니라 의무라는 견해가 있다. 옳은 판단이라고 생각된다. 권리의 향유는 개인의 선택이지만 의무는 선택일 수가 없다. 반드시 해야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행복이 그렇다. 행복은 권리로서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의무로서 부여받은 것이 인간의 조건임을 인정해야 한다. 

 행복찾기는 어디서부터 출발해야 하는가. 아프리카 오지에서 의료 봉사에 평생을 바친 슈바이쳐 박사의 어록(語錄)에 답이 있다.박사는“진정 행복하려면 남을 섬길 방도를 찾으라”고 일깨웠다. ‘행복학’까지를 애써 공부할 필요도 없이 행복의 길은 그렇게 가까이 열려 있는 셈이다. 섬김은 봉사의 다른 말이다. 봉사가 행복의 필수 요건이라는 뜻이다. 설날 귀성으로 민심 속에 들어갈 정치인들부터 이를 깊이 깨달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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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1년은 21세기의 새로운 10년이 시작되는 해 입니다. 세계가 찬연한 희망으로 새 밀레니엄의 개막에 환호했던 것처럼 2011년을 맞으면서도 그런 희망을 결코 접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지난 10년 동안의 격동을 경험한 우리로서는 새해를 맞으면서 새 희망을 기약하는 한편으로 앞날에 대한 우려 역시 떨치기 어렵습니다. 지금도 해결해야 할 과제가 산적해 있을 뿐 아니라 앞으로의 10년 동안 헤쳐가야 할 앞길 또한 여전히 험로(險路)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역사에는‘불가사의(不可思議:mysterious)한 사이클’이 되풀이 된다”고 했습니다. 2차 세계대전의 기운이 감돌던 때인 1936년, 미국 루즈벨트 대통령이 민주당 대선후보 재지명을 수락하면서 행한 연설의 한 구절입니다. 어쩌면 21세기의 두번째 10년으로 접어드는 2011년은 역사의 불가사의한 사이클에서 하나의 중요한 변곡점이 될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오늘의 세계조류가 그런 예감을 불러 옵니다.

 지금 유럽권 일부 국가들이 직면하고 있는 금융위기와 그것으로 빚어지고 있는 혼란은 미국에서 촉발된 국제 금융위기가 단시일 내에 벗어날 수 없는 재앙임을 거듭 확인시켜 주고 있습니다. 세계 경제의 봄은 아직 멀었다는 것입니다. 세계 도처에 위험 요소들이 잠복해 있습니다. 새 밀레니엄 초기의 9·11테러로 입증된 국제테러의 위험은 아직도 언제 어디서 어떤 형태로 폭발할지모르는 상태 그대로 입니다. 자원 확보를 위한 선진국들의 경쟁은 말 그대로 총성 없는 전쟁이나 다름없습니다. 우리의 국가적 이해와 직결되는 동북아 정세는 주변 강국들의 외교적 각축이 20세기 초입의 상황을 상기하게 합니다. 남북 관계 역시 2010년에 경험했던대로 긴장의 도를 높여가고만 있습니다. 말하자면 21세기의 10년을 지나고도 세계는 여전히 상쟁(相爭)의 시대를 청산하지 못한 것입니다. 

 국내 상황만 국한해 보아도 상쟁은 도처에서 쉬임없이 전개되고 있습니다. 정치권이 대표적인 현장입니다. 얼마 전 예산국회에서는 정파 이기주의, 선거구의 표심을 의식한 정치인 개개인의 탐욕이 국민 앞에 맨몸으로 노출되었습니다. 예산날치기를 감행한 여당이나 거리에 나와 시위하는 야당이나 모두 지난 날보다도 오히려 더 상쟁의 정치에 함몰돼 가고 있는 형국입니다.

 우리가 새해를 맞으면서 무엇보다 먼저 경계해야 할 것은 상생(相生)의 시대를 열지 않으면 앞으로 더욱 극렬한 상쟁의 시대가 전개될지 모른다는 사실입니다. 이제 말이 아닌 실천으로 상생의 길을 찾아야 하고 그 일은 소통에서 시작된다는 것을 공동체 구성원이 절실하게 자각해야 합니다. 

 상생과 상쟁, 소통과 불통은 각각 글자 한자씩 차이일 뿐입니다. 이는 상생도, 소통도 어려운 일이 아님을 뜻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상생의 시대 를 열어 가기 위해‘소통사회’를 만들어갈 것인가. 불통 상태로 상쟁을 지속할 것인가. 그것이 2011년 새해 아침에 우리에게 주어진 첫 번째 국가·사회적 과제입니다.

 과제의 해답은 간명합니다. 소통을 통한 상생의 나라 만들기를 국정의 기조로 삼아야 합니다. 정치권부터 소통하는 여야관계를 통해 상생의 정치를 국민 앞에 분명하게 보여 주어야 합니다. 무엇보다 먼저 정치 리더십이 그렇게 변해야만 2011년의 두 번째 10년 동안에 우리가 염원하는 선진국 진입과 통일의 꿈을 성취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반드시 상생의 시대를 열어가도록 하겠다는 소명감으로 2011년의 새 아침을 맞이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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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년칼럼
다시 송년의 달 12월을 맞으면서 지난 1년을 성찰해 보면 2010은 어느 해보다도 희망과 불안이 극명하게 교차한 해였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국내 상황이나 우리를 둘러싼 주변 정세 등이 모두 그러했습니다.
희망은 무엇보다 G20의 개최와 원조 공여국이 됐다는 사실을 통해 확인됐습니다. 88서울 올림픽 이후 가장 크게 세계의 주목을 받은 G20 회의를 의장국으로서 성공적으로 주관했다는 것은 한국이 국제 사회의 주변부에서 당당한 중심국으로 편입됐다는 증거가 아닐 수 없습니다. 반세기도 안 되는 짧은 기간에 원조 받는 나라에서 원조 하는 나라로 도약함으로써 선진국 진입을 위한 또 하나의 기본 자격도 갖추게 됐습니다.
세계적 금융위기의 터널에서 한국이 가장확실하고 빠르게 빠져나왔다는 평가도 있습니다. 아직 마음을 놓을 상황이 아니라 하더라도 성장율-수출규모 등 지표상으로는 분명 한국 경제의 지난 한해는 희망의 빛이 밝은 편이었습니다. 그러나 빛은 필연적으로 그늘을 드리운다는 것을 증명하듯 우리가 한 해 동안 체감한 불안의 그림자도 간과할 수 없을 만큼 짙었습니다.
천안함 비극, 연평도 포격은 이 땅에 아직도 전쟁의 위험이 상존한다는 분단현실을엄혹하게 일깨웠습니다. 우리의 근본적 불안은 그와 같은 비극이 언제 어떻게 재발할지 모른다는 우려에서 연유 합니다. 경제-사회적 측면에서도 불안은 여전합니다. 날이 갈수록 빈부 격차가 커지고 있습니다. 중산층은 점차 무너져 가고 이에 비례해서 한가닥 희망도 없이 빈곤층으로 전락하는 인구가 늘어갈 뿐 아니라 실업 청년들의 좌절감과 분노는 심화되고 있습니다.
2010년은 주변국들의 외교적 각축 양상이 어느 해 보다도 두드러진 한해였습니다. 경제적 이해와 영토 문제를 놓고 미국과 중국, 그리고 일본과 중국 및 러시아가 벌이는 외교적 각축은 100년 전 망국시기에 한반도를 둘러쌓고 빚어졌던 열강의 패권다툼을 어쩔수 없이 상기토록 합니다. 더욱 걱정되는 것은, 이 나라들의 불편한 관계가 빠른 시일 안에 개선될 기미도 보이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여기에 더해 중국의 대북혈맹(血盟)강조, 6/25 의미의 왜곡 발언등이 나왔습니다. 이는 우리와 북한을 상대하는 중국의 전략이 한반도 통일에 장애가 될 수 있음을 강하게 시사합니다.
국내외 상황이 이처럼 엄중한데도 나라를 이끌어야 할 정치는 오히려 뒷걸음입니다. 청문회에서 여실히 확인되었듯이 지도층의 도덕적 타락 역시 근본적 치유의 길이 과연 있는가를 회의하게 할 정도입니다. 해를 마감하는 시점에서도 우리의 불안이 가시지 않는 까닭은 바로 그 때문이기도 합니다.
새삼 되돌아보면 2010년은 역사의 연표(年表)만으로도 우리에게 참으로 각별한 해였습니다. 21세기의 첫 10년이면서 망국 100년, 동족상잔의 전쟁 발발 50년, 경부 고속도로 개통으로 상징되는 산업화의 본격시동 40년, 민주화의 뼈아픈 진통이었던 광주의 비극 30년인 해였습니다. 이처럼 각별했던 2010년을 마감하면서 우리가 거듭 확인해야 하는 것은, 경제적 성취만으로는 진정한 강대국이 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이제 우리는 문화 대국- 윤리도덕의 강국을 만들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반드시 소통과 나눔이 일상화되는 사회로 가야 합니다.
지난 1년 동안 드러난 북한의 여러 정황들은 통일의 기반을 실질적으로 구축해야 할때임을 일깨웁니다. 본격적으로 통일을 준비해야 할 시점이라는 의미입니다. 우리가 지향해야 할 이 모든 목표는 결국 정치적 리더십의 선진화 여부에달려 있습니다. 지금 한국 사회에서 정치 리더십의 선진화야 말로 가장 확실한 희망의 약속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가 오는 2011년을 희망의 해로 만들어야 할 막중한 책임을 분담하고 있음을 깊이 인식하면서 2010년 한해를 마감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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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지하에서 신과 악마와 함께 했다. 신이 나를 선택했다”- 지하 700미터의 갱도에 갇혀 있다가 69일 만에 두 번째로 구출된 ‘칠레 광부’가 세상에 나와 토로한 첫 환호성이다. 어느 목회자의 설교나 어떤 신앙인의 간증보다도 훨씬 더 강렬하고 감동적인 ‘복음’으로 들린다. 극한의 절망을 체험한 사람만이 전할 수 있는 희망의 메시지인 셈이다.

   칠레 광부가 전한 이 메시지 속의 신과 악마는 반드시 종교적 의미만이 아니라 고난의 상황을 견디어 낸 자기의지의 다른 표현으로도 받아들여진다. 따라서 그의 말을 변용(變容)하면 이렇게 이해된다. “나는 지하에서 희망과 절망과 함께 했다. 희망이 나를 구했다.”

   지하 갱도뿐인가. 지상에도 그런 지역이 있다. 2천3백만 여명의 사람이 사는 북한 땅이다. 북한 동포들은 지금 하루하루 희망과 절망이 함께 하는 ‘지하의 삶’을 이어가는 거나 다름없는 상태다. 그들을 어떻게 구출해야 하는가.

   대북지원은 지금 첨예한 정치-정책-사회적 논란거리다. 무엇을 어떻게 지원하든 간에 그것들은 결국 북한 정권의 핵무장을 도와 줄 뿐이라는 논리가 있다. 지원은 하되 북한동포에게 물품이 제대로 전달되는가를 확인 할 수 있어야 한다는 의견도 제기된다. 굶주리는 북한동포들의 참상을 더 이상 방치 할 수 없음으로 쌀 등 생필품은 서둘러 보내야 한다는 주장도 설득력 있게 들려온다.

   무엇이 정답인가. ‘밥이 사랑’이라는 잠언의 함의(含意)는 밥이야 말로 사람이 생존권을 확보하기 위한 절대적 기본요건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정부 정책으로서가 아니라 개인과 사회단체의 정성을 모아 기아 상태의 북한동포들이 밥만은 먹을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야말로 이 시대에 우리가 해야 할 인간으로서의 도리다. ‘평화의 쌀 보내기는 바로 그런 도리의 구체적 실천이다.

   칠레광부들은 캄캄한 지하에서 이틀에 과자 반쪽·참치통조림 두 숟가락· 유유 반컵씩으로 버티었다고 한다. 상징비유로 파악하면 북한동포들의 삶도 대부분 그런 지경이다.

   칠레광부들은 매몰 후 17일 만에 뚫린 직경 12센티의 암반구멍을 통해 구호물품이 들어오면서 부터 살아나갈 수 있다는 희망을 일구었다. 북한동포들도 훗날 “희망이 우리를 구했다”고 말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평화의 쌀 보내기는 북한동포들을 향해 ‘생존구멍’을 뚫는 운동이고 그것을 통해 전달되는 쌀은 그들에게 희망을 키우는 자양(滋養)이 될 터이다. 사회 각계각층의 적극적인 호응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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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 낮추기 정치’의 안팎

‘몸 낮추기’가 정치권에서 유행이다. 지난 7/28 보궐선거 이후부터 드러나고 있는 현상이다. 이를 뚜렷하게 알려주는 사진 한 장이 얼마 전 신문에 대문짝만하게 실렸다. 여권 실세 한명이 선거에서 승리하고 당사를 찾아와 어느 최고위원과 인사를 나누는데 서로 머리가 땅에 닿을 정도였다. 보는 사람에 따라 일종의 희화(戱畵)로 느낄만한 사진이었다.  

실제로 ‘왕의 남자’로 불릴 정도인 그 여당 정치인은 선거 기간 내내 몸 낮추기 운동을 인상 깊게 시범했다. 권력 실세임에도 불구하고 중앙당의 지원을 거부한 채 요란한 유세도 없이 밤낮을 가리지 않고 낮은 자세로 유권자에게 다가 갔다. 그리고 압승했다.  

반드시 그를 본받아서라고 볼 수는 없겠지만 새 총리 내정자 역시 몸 낮추기 제스처를 보여주었다. 내정자에게 의례적으로 배정되는 승용차를 마다하고 한 급 낮은 차를 주문해서 정부종합 청사에 마련된 총리 내정자 사무실에 첫 출근하는 모습이 보도 됐다.40대의 젊은 총리 내정자가 보여주는 이런 몸 낮추기 자세가 국민의 눈에는 어떻게 비쳐졌을까.  

정치인의 몸 낮추기가 국민을 나라의 주인으로 섬기겠다는 속뜻을 가시적으로 표현하는 행위라면 바람직한 일이다. 하지만 정치권의 돌아가는 모양새를 통해 보면 정치인들의 몸 낮추기에 과연 진정성이 있는가하는 의구심이 가시지 않는다. 지금 여야 없이 드러내 보이고 있는 내부 갈등은 우리 정치의 본질적 생리가 여전히 국민보다도 권력, 민생보다도 계파이익이 먼저라는 사실을 확인시켜 주는 듯싶다. 섬김은 없고 정쟁만 난무하는 꼴이고 보니 몸 낮추기가 그저 보도 사진용이 아닌가하는 생각마저 들 정도다.  

국민은 지난 6/2 지방선거와 7/2 재•보궐 선거를 통해 여야 정치권에 순차적으로 엄중한 경고를 내렸다. 그래서 여당은 지방 선거에 완패하고 나서, 야당은 재•보선에 참패 한 후 각각 패배의 원인을 ‘오만’이라고 자체 진단하고 ‘국민이 무섭다’고 했다.  

양명학(陽明學)의 효시인 중국 명나라 중기의 사상가 왕양명의 어록을 수록한 ‘전습록’傳習錄)에는 이런 경구가 나온다.“인생의 가장 큰 병폐는 오직 傲(오- 거만함)라는 한 글자에 있다”(人生大病 只是一傲字) . 어디 개인의 삶뿐이겠는가. 예나 지금이나 정치 또는 정치인이 가장 경계해야 할 자세는 오만이다. 정치인 개개인이 보여주는 외형적 몸 낮추기보다도 국민과의 소통을 통한 섬김의 정치야 말로 시대적 요구라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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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이 걱정이다’

 “학교는 존재하는데 교육은 실종상태다. 선생님은 있는데 가르침이 없고 학생은 많은데 배움은 태부족이다”- 요즈음 초중고교에서 벌어지고 있는 이런저런 사고 소식을 접하면서 나라 걱정하는 사람들이 떠올리는 생각이다. 더욱 개탄스러운 것은 6․2 지자체 선거결과 교육행정조차도 정치화돼가는 추세라는 점이다.  

실로 교육이 걱정이다. 언론 보도를 통해 보면 교사와 학생의 관계가 실로 파탄지경으로 치닫고 있는 듯싶다. 최근 사례만 보아도 그렇다. 교실에서 휴대폰을 빼앗긴 중학교 학생이 선생님에게 의자를 집어 던진다. 학생을 상습적으로 폭행한 중학교 교사가 결국 직위해제 되는 가하면 고교 교사가 학생들에게 주먹을 휘두르는 장면을 학생이 촬영해 올린 동영상이 인터넷 공간에 떠돈다. 사랑과 존경으로 맺어져야 할 사제(師弟) 관계는 말 그대로 ‘옛날 얘기’가 돼 가고 있는 형국이다. 

실제로 교사가 학생으로부터 폭언․폭행․협박을 당한 경우가 2005년 52건에서 2009년에는 108건으로 두 배 이상 늘었다.(한국교총의 교사상담 사례 조사).문제가 될 정도의 학생체벌 역시 끊이지 않는다. '참교육을 위한 전국학부모회'가 2008~09년 학부모를 상담한 사례를 보면, 전체 1126건 중 교사의 학생에 대한 체벌(110건)과 언어폭력(26건)이 12%(136건)를 차지했다.

교사와 학생 관계만이 아니다. 학생들 사이의 폭력도 늘어만 간다. 학교 폭력 대책자치위원회의 초중고등 학생에 대한 폭력심의 건수는 2005년 2518건에서 2008년 8813건으로 늘었다. 3년 동안 3배 증가한 꼴이다.

 학교가 이처럼 날로 황폐화 되고 있는데도 교육 행정가들은 자신들의 정치적․이념적 성향에 따라 교육문제에 접근하고 이를 고집한다. 그래서 교사평가․ 학력평가 고사․ 무상급식 등의 실시여부, 특목고의 존폐나 교과 운용 방식 등 모든 교육현안을 놓고 시․도 교육감마다 다른 목소리를 낸다. 그 뿐인가. 선거법 위반혐의로 실형 받은 교육감의 선거비용과 관련해서 교육청 산하 교육장 2명이 뇌물 공여협의로 사법처리 되기도 했다. 교육행정에 까지 정치적 이해관계가 작용하고 있다는 방증이다. 선거로 교육감을 결정하는 현행제도에 회의가 제기되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어떻게 해야 하는가.교육의 해법 찾기에서 반드시 전제돼야 할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교육행정에서 정치를 떼어 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교육감 선출방식의 개선이 당장의 과제다. 둘째는 가정교육의 중요성에 대한 참된 인식이다. 가정교육이야 말로 교육의 출발이라는 사회적 공감의 확산이 긴요하다. 정치가 바른 길을 가고 가정마다 사랑으로 충만할 때 학교는 자연스럽게 나라의 희망을 꽃피우는 공간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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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멘에서 우리나라 여성 한명이 다른 외국인 8명과 함께 납치된 후 무참히 살해됐다. 지난 3월 같은 예멘 땅에서 자폭테러로 우리 관광객 3명이 목숨을 잃은 지 석 달만의 참변이다. 새 밀레니엄이 시작된 2000년 이후에 예멘에서 발생한 외국인 테러․납치 사건만 이번 참변까지를 포함해서 9번에 이른다. 당연히 무고한 생명들이 적지 않게 희생됐다.

  예멘에서 뿐인가. 지금 파키스탄에서도 다른 양상으로, 그러나 훨씬 심대한 규모로 야만적 폭력행위가 자행되고 있다. 텔레반이 장악하고 있는 파키스탄 북서부 스와트 계곡에서는 율법에 어긋난 행동을 하는 주민은 무자비하게 참수당하고 시신들은 교차로에 버려지고 있다는 것이 그곳을 빠져나온 주민들의 증언이라고 외신은 전하고 있다.

  파키스탄 정부가 북서부 스와트 계곡지역을 중심으로 탈레반에 대한 강경 진압에 나서면서 빚어지는 참상이다. 외신에 따르면 파키스탄 수도 이슬라마바드에서 북서쪽으로 150㎞ 떨어진 스와비의 유엔 난민캠프에는 텔레반 지배 지역을 도망쳐 나온 난민 130여 만명이 수용돼 있다는 것이다.

  지금 예멘의 사막과 파키스탄의 오지(奧地)에서 그와 같이 참담하게 벌어지고 있는 야만적 폭력이 바로 종교 근본주의에서 기인한다는 것은 이미 세상이 다 아는 일이다. 이번 예멘 참사도 범인들이 누구인지 아직은 명확하게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희생자들의 시신 훼손으로 미루어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의 소행일 것이라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파키스탄 난민 수용소에 수용된 어느 소녀가 ‘이제 행복한 날은 다시 오지 않을 것’ 이라며 슬퍼했다는 외신 보도는 읽는 이의 가슴을 짓누른다. 이슬람 근본주의의 수호를 명분으로 벌여온 ‘지하드’(聖戰: 성전)의 과정과 결과는 어린 소녀의 순수한 혼에 치유하기 어려운 상처를 안겨 주었음을 절실하게 상징한다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문명의 충돌’이라고 했던가. 문명충돌 없는 세상은 과연 구현 불가능한 꿈인가. 이런 자문(自問)과 함께 세상의 도처에 자리 잡은 수많은 교회와 모스크(이슬람 사원) 그리고 사찰의 존재의미를 새삼 생각하게 된다. 그곳들만이 평화와 구원을 기원하기 위한 장소인가. 이제 새로운 시각이 절실하게 요구되는 시점이 아닌가 싶다.

  아프리카인이건 아시아인이건 유럽인이건 간에, 흑인이건 백인이건 황색인이건 간에 한자리에 모여 기도하는 장소라면 그곳이 바로 진정한 교회이고 모스크이고 사찰이 아니겠는가. 종교 종파주의-인종 순혈주의-국가 이기주의를 초극하자는 것이다. 바로 초종교-초인종-초국가 사상이 이 세상에서 야만적 폭력을 근절하는 길임을 거듭 확인하게 되는 요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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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대사회에서 대중문화예술인이 최고의 인기 직업인으로 자리 잡은 이유는, 사람들에게 꿈을 심어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꿈은, 사실상 영화나 드러머 연극 등 허구의 세계를 통해서일 뿐 생활현장에서도 반드시 그 양상이 똑같이 나타나는 건 아니다. 그렇다면 대중 문화예술인- 바로 연예인은 어떻게 대중에게 현실에서도 바람직한 삶의 모습을 수범(垂範)할 수 있는가. 벨기에 출신 여배우 오드리 헵번과 우리나라의 ‘국민 탤런트’ 김혜자가 그에 대한 모범답안을 제시한다.

  윌리엄 와일러 감독의 저 유명한 영화 ‘로마의 휴일’로 아카데미 주연 여우상을 수상했을 뿐 아니라 전 세계 영화 팬의 마음에 잊지 못할 청순미를 각인시켜 준 오드리 헵번의 ‘스타인생’은 말 그대로 화려했다. 그러나 그의 생애는 스타로서보다도 그 말년에 아프리카 어린이들을 위해 치열하게 실천했던 봉사로서 훨씬 더 빛난다.

  암으로 63세라는 아까운 나이에 고인(1993년 별세)이 된 그가 세상을 떠나기 전 병석에서 인생지침으로 어린 아들을 위해 남긴 말은 사람이 어떤 자세로 살아야 하는지를 깨우쳐 주는 ‘어록(語錄)’으로 지금도 널리 회자(膾炙)되고 있다. 그 마지막 구절 - “네가 더 나이가 들면 손이 두 개라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한 손은 너 자신을 돕는 손이고 다른 한 손은 다른 사람들을 돕는 것이다.”- 진정으로 아름다운 영혼의 소유자로 '위하는 삶'을 실천한 사람이 아니라면 어떻게 이토록 간명한 비유로 인생의 진실을 일깨울 수 있겠는가.

  인기 드러머 ‘전원 일기’를 통해 한국의 전형적인 어머니상을 보여준 우리의 스타 탤런트 김혜자 역시 아프리카 등 세계 곳곳에서 전쟁과 기아와 질병으로 고통 받는 어린이들을 위해 오랜 동안 봉사활동을 해 왔다. 그가 몇 해 전에 펴낸 수필집 “꽃으로도 때리지 말라”에는 절실한 인간애가 진솔하게 녹아 있다. 그는 “연기 인생이 끝나면 아프리카에서 가난한 아이들을 안아주며 생을 마치고 싶다“고도 했다.

  대중문화예술계 지도자들이 주축이 되어 세계평화문화예술포럼이 결성된다. 인간에 대한 사랑이 문화예술인의 본질적 자산이라면 평화운동에 앞장서는 일이야말로 대중의 정서에 거의 절대적인 영향력을 가진 모든 문화예술인-특히 연예인들의 책임 몫이라고 할 수 있다. 포럼 결성을 계기로 오드리 헵번과 김혜자가 뜨거운 인간애를 통해 현실에서 실천했던 평화운동이 우리 문화 예술계전반으로 확산되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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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은 일찍이 5월을 일러 '계절의 여왕'이라고 했다. 그만큼 우리나라의 5월은 아름답다. 산야가 온통 초록으로 물든다. 그것은 바로 희망의 상징색이다. 그러나 자연의 외양과는 달리 서민의 생존에 5월은 고난의 계절이었던 것이 우리의 역사다. 힘겨운 보리 고개가 시작되는 달이 바로 5월이었기 때문이다.

   지금은 어떤가. 5일 어린이 날을 끼고 이어지는 연휴에 국내외 항공편 예약이 벌써 끝났다는 보도다. 굶주리는 보릿고개가 아니라 유락(遊樂)의 절정기인 셈이다. 그러나 눈을 돌려보면 행락의 계절일수록 상대적 빈곤감을 더 짙게 느껴야 하는 서민층이 훨씬 많다.

   때마침 불기(佛紀) 2553년인 올해 석탄 탄신일(5월2일)을 축하하는 행사표어가 ‘나누는 기쁨 함께하는 세상’이다. 불교계는 이를 위해 병원 연꽃등 선물, 난치병 어린이 돕기 3000배 정진기도, 이웃을 위한 희망의 등 달기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펼칠 것이라고 한다.

   ‘나눔’을 강조한 불교계의 이번 석탄일 행사표어를 접하면서 개인적으로 초종교 사상의 시대적 당위성을 거듭 확인하게 된다. 불교정신의 정수(精髓)라고 할 수 있는 ‘자비(慈悲)’와 기독교 교리의 핵심인 ‘사랑’은 그 현세적 실천 방법에서는 조금도 다를 것이 없기 때문이다. 나눔의 실천이 그 출발이다.

   반드시 종교적 관점이 아니더라도 나눔의 실천이야말로 오늘과 같은 탐욕의 시대에 가장 절실히 요구되는 공동체의 덕목이다. 사회적으로도 그렇고 개인적으로도 마찬가지다. 따라서 나눔 문화의 확산이야 말로 인간의 탐욕으로 초래된 이 위기의 시대를 극복하기 위한 가장 확실한 처방전이다.

   어떻게 해야 하는가. 개인적으로는 ‘나 자신’부터 나눔을 실천하겠다는 자세가 소중하다. 사회적으로는 기부와 자선의 관행이 보편화돼야 한다. 그리하여 궁극적으로는 종교의 차이 혹은 국가이기주의를 넘어 나눔의 실천이 범세계적 운동으로 번져가야 한다.

   나눔을 반드시 물질적인 것으로 국한 시킬 필요도 없다. 기쁨은, 나누면 배로 늘어나고 고통은, 나누면 반으로 줄어든다고 했다. 절대왕조 시대에도 흉년이 들면 어진 임금은 수라상의 찬을 줄였다. 국가 리더십은 백성의 고통을 그렇게 분담했다. 나눔 문화의 정착과 확산 역시 정치의 역할이 가장 긴요하다는 뜻이다. 화사한 5월을 다시 맞으면서 정치가 솔선하는 나눔의 시대가 빨리 오기를 소망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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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랫동안 한국인에게 ‘이모’는 엄마 말고는 가장 정겨운 호칭이었다. 이모는 엄마와는 또 다르게 살가움을 느끼게 하는 사랑의 이름이었다. 그리하여 지금도 도심의 골목에서 ‘이모네’를 옥호로 내건 토속음식점 간판은 적어도 농경시대를 산 세대에게는 잃어버린 유년을 향수처럼 떠 올리게 한다. 그러나 그런 날도 끝나 가고 있다.

   이모가 거의 사어(死語)가 돼 가는 시대다. 어디 이모뿐인가. 고모도 그렇고 큰아버지 삼촌 외숙 등 다른 친족호칭 모두가 마찬가지다. 한 가정 두형제가 보편적인 지금까지는 형 오빠 동생의 호칭은 명맥이 그런대로 유지돼 왔지만 그것들조차도 가족관계에서 쓰이게 되는 경우가 사라지는 세상이 되어가고 있다. 우리나라의 출산율이 이를 구체적으로 예고해 준다.

   우리나라는 이제 여성이 평생 낳는 아기수를 나타내는 출산율이 도시국가 홍콩을 제외하고 세계에서 가장 낮은 1.19명으로 초저(超低)출산국이 되고 말았다. 얼마 전 이 통계치를 발표하는 자리에서 여성 각료인 보건복지부 장관은 ‘준(準)비상사태’라는 말로 그 심각성을 설명했다.

   전망은 더욱 어둡다. 저출산 추세가 이대로 지속되면 2200년에는 우리나라 인구가 140만여명으로 쪼그라들 것이라는 참담한 비관론까지 나온다. 더욱 간과할 수 없는 점은 그런 단계에 이르기 전에 우리나라는 국가로서의 존립 자체가 위협받게 될 것이라는 사실이다.

우리나라 저출산의 원인으로는 출산 장려를 위한 지원 제도의 미흡 등이 제기되고 우선적인 해결책도 거기에 기준한다. 그래서 선진국 가운데 출산율이 상대적으로 높은 프랑스처럼 출산수당등 각종지원제도의 확충이 해법으로 제시되고 있다. 그러나 출산율과 관련해서 먼저 성찰해야 할 것은 우리 사회의 기풍이다.

   오늘의 한국사회는 모든 분야에서 비생산적 기류가 팽배하다. 상징적으로 말하면 ‘불임(不姙)사회’인 셈이다. 정치판의 행태가 그렇고 경제상황과 사회기류도 마찬가지다. 개인-집단-지역- 세대-성별에 관계없이 공동체의 미래를 위해 화합-협력하는 생산적 기풍은 어느 곳에서도 찾기 어렵다.

  저출산도 바로 사회 기풍의 연장이다. 그때 그때 나만의 행복향유만으로 그만이라는 의식이 보편화됨에 따라 인간관계에서도 극도의 개인주의 혹은 이기주의 성향이 확산돼 왔다. 지금에 와서는 날로 더해가는 세태의 각박함이 개인으로 하여금 미래에 대한 희망을 잃어가게 하고 있다. 저출산은 거기서 연유한다.

   가정이라는 단위가 없다면 세계는 사실상 개인에게 무의미하다. 가정은 부모와 형제로부터 출발하여 친족으로 확대되고 그 관계의 총화가 인류다. 우리말에 유난히 친족호칭이 발달되어 있다는 것은 그만큼 ‘사랑의 공동체’를 소중하게 여겼다는 증명일 수 있다. 이모를 비롯한 정겨운 친족호칭이 되살아나는 세상을 만드는 것이 우리에게 부여된 시대적 소명의 하나다.

Posted by 평화행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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