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절 때의 귀성은 단순히 고향을 찾는 다는 것 이상의 의미가 있다. 귀성은, 엄밀히 성찰해 보면 스스로 종족(宗族)의 일원임을 확인하게 되는 기회다.

실제로 우리는 귀성해서 조상 산소에 성묘하고 고향에 남아 있는 집안 어르신 등 일가친척들을 찾아 인사를 나눈다. 그것이야 말로 우리가 바쁜 일상에서 거의 잊고 지냈던, 종족이라는 공동체의 실체를 한 때나마 새삼 감지할 수 있게 되는 전통의례(儀禮)의 하나다.

종족은 역사적으로 가장 끈끈하게 맺어진 공동체 단위였다. 종가(宗家)- 종문(宗門)-종친(宗親)-종씨(宗氏) 등은, 말하자면 종족 공동체의 결속을 상징하는 말이다.

우리 조상들은 종족의 전통을 통해 삶의 규범과 덕목을 배워왔다. 지금 우리 사회가 시급히 치유해야 할 제반 사회적 병리(病理)는 바로 그와 같은 종족전통의 상실로 초래된 결과가 아닌가 싶다.

물론 시대는 변했다. 종족전통을 삶의 가치로 고수하고 종족의 결속을 옛날처럼 유지하기에는 현대사회는 너무나 복잡다기하다. 그러나 바로 시대상이 그렇기 때문에 종족의 소중함은 오히려 더해진다.

다문화 시대다. 우리나라의 경우 다문화 가정이 어느 나라에서 보다 빠르게 확산되고 있다.

자살율- 이혼율은 제일 높고 출산율은 가장 낮은 상황에서 다문화 가정은 날로 증가 한다. 순혈주의를 기반으로 했던 전통적 종족구성이 필연적으로 초인종-초국가- 초종교의 양상으로 개편돼 갈 수밖에 없음을 말해 주는 현상이다.

현재 우리나라에 거주하는 외국인은 1백 20만여명이다. 한국인과 결혼해서 살고 있는 남녀만도 18만여명에 이르고 그 가운데 베트
남 등 주로 동남아 개발도상국 출신으로 한국에서 시부모를 모시며 가정을 꾸려가는 여성들이 가장 많다. 이들이야 말로 한국 사회에서 종족 공동체 구성의 세계화에 핵심적 존재라는 상징성을 지닌다.

대부분 한자 사용권인 아시아 각국은 공유하는 세시(歲時)풍속도 적지 않다. 추석명절도 그 가운데 하나다. 이를 감안할 때 동남아 출신 결혼이민 여성들의 경우 명절에 평소보다 오히려 더욱 짙은 향수에 잠기게 될 지도 모른다. 추석과 같은 명절 때일수록 이들에 대한 사회전체의 관심과 함께 이웃의 온정이 요구되는 이유다. 그들이 긍지를 갖고 진정으로 한국의 종족에 귀속토록 하는 일이야 말로 이 시대의 국민적 책무라는 생각을 추석에 즈음해서 거듭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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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멘에서 우리나라 여성 한명이 다른 외국인 8명과 함께 납치된 후 무참히 살해됐다. 지난 3월 같은 예멘 땅에서 자폭테러로 우리 관광객 3명이 목숨을 잃은 지 석 달만의 참변이다. 새 밀레니엄이 시작된 2000년 이후에 예멘에서 발생한 외국인 테러․납치 사건만 이번 참변까지를 포함해서 9번에 이른다. 당연히 무고한 생명들이 적지 않게 희생됐다.

  예멘에서 뿐인가. 지금 파키스탄에서도 다른 양상으로, 그러나 훨씬 심대한 규모로 야만적 폭력행위가 자행되고 있다. 텔레반이 장악하고 있는 파키스탄 북서부 스와트 계곡에서는 율법에 어긋난 행동을 하는 주민은 무자비하게 참수당하고 시신들은 교차로에 버려지고 있다는 것이 그곳을 빠져나온 주민들의 증언이라고 외신은 전하고 있다.

  파키스탄 정부가 북서부 스와트 계곡지역을 중심으로 탈레반에 대한 강경 진압에 나서면서 빚어지는 참상이다. 외신에 따르면 파키스탄 수도 이슬라마바드에서 북서쪽으로 150㎞ 떨어진 스와비의 유엔 난민캠프에는 텔레반 지배 지역을 도망쳐 나온 난민 130여 만명이 수용돼 있다는 것이다.

  지금 예멘의 사막과 파키스탄의 오지(奧地)에서 그와 같이 참담하게 벌어지고 있는 야만적 폭력이 바로 종교 근본주의에서 기인한다는 것은 이미 세상이 다 아는 일이다. 이번 예멘 참사도 범인들이 누구인지 아직은 명확하게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희생자들의 시신 훼손으로 미루어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의 소행일 것이라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파키스탄 난민 수용소에 수용된 어느 소녀가 ‘이제 행복한 날은 다시 오지 않을 것’ 이라며 슬퍼했다는 외신 보도는 읽는 이의 가슴을 짓누른다. 이슬람 근본주의의 수호를 명분으로 벌여온 ‘지하드’(聖戰: 성전)의 과정과 결과는 어린 소녀의 순수한 혼에 치유하기 어려운 상처를 안겨 주었음을 절실하게 상징한다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문명의 충돌’이라고 했던가. 문명충돌 없는 세상은 과연 구현 불가능한 꿈인가. 이런 자문(自問)과 함께 세상의 도처에 자리 잡은 수많은 교회와 모스크(이슬람 사원) 그리고 사찰의 존재의미를 새삼 생각하게 된다. 그곳들만이 평화와 구원을 기원하기 위한 장소인가. 이제 새로운 시각이 절실하게 요구되는 시점이 아닌가 싶다.

  아프리카인이건 아시아인이건 유럽인이건 간에, 흑인이건 백인이건 황색인이건 간에 한자리에 모여 기도하는 장소라면 그곳이 바로 진정한 교회이고 모스크이고 사찰이 아니겠는가. 종교 종파주의-인종 순혈주의-국가 이기주의를 초극하자는 것이다. 바로 초종교-초인종-초국가 사상이 이 세상에서 야만적 폭력을 근절하는 길임을 거듭 확인하게 되는 요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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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대사회에서 대중문화예술인이 최고의 인기 직업인으로 자리 잡은 이유는, 사람들에게 꿈을 심어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꿈은, 사실상 영화나 드러머 연극 등 허구의 세계를 통해서일 뿐 생활현장에서도 반드시 그 양상이 똑같이 나타나는 건 아니다. 그렇다면 대중 문화예술인- 바로 연예인은 어떻게 대중에게 현실에서도 바람직한 삶의 모습을 수범(垂範)할 수 있는가. 벨기에 출신 여배우 오드리 헵번과 우리나라의 ‘국민 탤런트’ 김혜자가 그에 대한 모범답안을 제시한다.

  윌리엄 와일러 감독의 저 유명한 영화 ‘로마의 휴일’로 아카데미 주연 여우상을 수상했을 뿐 아니라 전 세계 영화 팬의 마음에 잊지 못할 청순미를 각인시켜 준 오드리 헵번의 ‘스타인생’은 말 그대로 화려했다. 그러나 그의 생애는 스타로서보다도 그 말년에 아프리카 어린이들을 위해 치열하게 실천했던 봉사로서 훨씬 더 빛난다.

  암으로 63세라는 아까운 나이에 고인(1993년 별세)이 된 그가 세상을 떠나기 전 병석에서 인생지침으로 어린 아들을 위해 남긴 말은 사람이 어떤 자세로 살아야 하는지를 깨우쳐 주는 ‘어록(語錄)’으로 지금도 널리 회자(膾炙)되고 있다. 그 마지막 구절 - “네가 더 나이가 들면 손이 두 개라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한 손은 너 자신을 돕는 손이고 다른 한 손은 다른 사람들을 돕는 것이다.”- 진정으로 아름다운 영혼의 소유자로 '위하는 삶'을 실천한 사람이 아니라면 어떻게 이토록 간명한 비유로 인생의 진실을 일깨울 수 있겠는가.

  인기 드러머 ‘전원 일기’를 통해 한국의 전형적인 어머니상을 보여준 우리의 스타 탤런트 김혜자 역시 아프리카 등 세계 곳곳에서 전쟁과 기아와 질병으로 고통 받는 어린이들을 위해 오랜 동안 봉사활동을 해 왔다. 그가 몇 해 전에 펴낸 수필집 “꽃으로도 때리지 말라”에는 절실한 인간애가 진솔하게 녹아 있다. 그는 “연기 인생이 끝나면 아프리카에서 가난한 아이들을 안아주며 생을 마치고 싶다“고도 했다.

  대중문화예술계 지도자들이 주축이 되어 세계평화문화예술포럼이 결성된다. 인간에 대한 사랑이 문화예술인의 본질적 자산이라면 평화운동에 앞장서는 일이야말로 대중의 정서에 거의 절대적인 영향력을 가진 모든 문화예술인-특히 연예인들의 책임 몫이라고 할 수 있다. 포럼 결성을 계기로 오드리 헵번과 김혜자가 뜨거운 인간애를 통해 현실에서 실천했던 평화운동이 우리 문화 예술계전반으로 확산되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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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은 일찍이 5월을 일러 '계절의 여왕'이라고 했다. 그만큼 우리나라의 5월은 아름답다. 산야가 온통 초록으로 물든다. 그것은 바로 희망의 상징색이다. 그러나 자연의 외양과는 달리 서민의 생존에 5월은 고난의 계절이었던 것이 우리의 역사다. 힘겨운 보리 고개가 시작되는 달이 바로 5월이었기 때문이다.

   지금은 어떤가. 5일 어린이 날을 끼고 이어지는 연휴에 국내외 항공편 예약이 벌써 끝났다는 보도다. 굶주리는 보릿고개가 아니라 유락(遊樂)의 절정기인 셈이다. 그러나 눈을 돌려보면 행락의 계절일수록 상대적 빈곤감을 더 짙게 느껴야 하는 서민층이 훨씬 많다.

   때마침 불기(佛紀) 2553년인 올해 석탄 탄신일(5월2일)을 축하하는 행사표어가 ‘나누는 기쁨 함께하는 세상’이다. 불교계는 이를 위해 병원 연꽃등 선물, 난치병 어린이 돕기 3000배 정진기도, 이웃을 위한 희망의 등 달기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펼칠 것이라고 한다.

   ‘나눔’을 강조한 불교계의 이번 석탄일 행사표어를 접하면서 개인적으로 초종교 사상의 시대적 당위성을 거듭 확인하게 된다. 불교정신의 정수(精髓)라고 할 수 있는 ‘자비(慈悲)’와 기독교 교리의 핵심인 ‘사랑’은 그 현세적 실천 방법에서는 조금도 다를 것이 없기 때문이다. 나눔의 실천이 그 출발이다.

   반드시 종교적 관점이 아니더라도 나눔의 실천이야말로 오늘과 같은 탐욕의 시대에 가장 절실히 요구되는 공동체의 덕목이다. 사회적으로도 그렇고 개인적으로도 마찬가지다. 따라서 나눔 문화의 확산이야 말로 인간의 탐욕으로 초래된 이 위기의 시대를 극복하기 위한 가장 확실한 처방전이다.

   어떻게 해야 하는가. 개인적으로는 ‘나 자신’부터 나눔을 실천하겠다는 자세가 소중하다. 사회적으로는 기부와 자선의 관행이 보편화돼야 한다. 그리하여 궁극적으로는 종교의 차이 혹은 국가이기주의를 넘어 나눔의 실천이 범세계적 운동으로 번져가야 한다.

   나눔을 반드시 물질적인 것으로 국한 시킬 필요도 없다. 기쁨은, 나누면 배로 늘어나고 고통은, 나누면 반으로 줄어든다고 했다. 절대왕조 시대에도 흉년이 들면 어진 임금은 수라상의 찬을 줄였다. 국가 리더십은 백성의 고통을 그렇게 분담했다. 나눔 문화의 정착과 확산 역시 정치의 역할이 가장 긴요하다는 뜻이다. 화사한 5월을 다시 맞으면서 정치가 솔선하는 나눔의 시대가 빨리 오기를 소망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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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랫동안 한국인에게 ‘이모’는 엄마 말고는 가장 정겨운 호칭이었다. 이모는 엄마와는 또 다르게 살가움을 느끼게 하는 사랑의 이름이었다. 그리하여 지금도 도심의 골목에서 ‘이모네’를 옥호로 내건 토속음식점 간판은 적어도 농경시대를 산 세대에게는 잃어버린 유년을 향수처럼 떠 올리게 한다. 그러나 그런 날도 끝나 가고 있다.

   이모가 거의 사어(死語)가 돼 가는 시대다. 어디 이모뿐인가. 고모도 그렇고 큰아버지 삼촌 외숙 등 다른 친족호칭 모두가 마찬가지다. 한 가정 두형제가 보편적인 지금까지는 형 오빠 동생의 호칭은 명맥이 그런대로 유지돼 왔지만 그것들조차도 가족관계에서 쓰이게 되는 경우가 사라지는 세상이 되어가고 있다. 우리나라의 출산율이 이를 구체적으로 예고해 준다.

   우리나라는 이제 여성이 평생 낳는 아기수를 나타내는 출산율이 도시국가 홍콩을 제외하고 세계에서 가장 낮은 1.19명으로 초저(超低)출산국이 되고 말았다. 얼마 전 이 통계치를 발표하는 자리에서 여성 각료인 보건복지부 장관은 ‘준(準)비상사태’라는 말로 그 심각성을 설명했다.

   전망은 더욱 어둡다. 저출산 추세가 이대로 지속되면 2200년에는 우리나라 인구가 140만여명으로 쪼그라들 것이라는 참담한 비관론까지 나온다. 더욱 간과할 수 없는 점은 그런 단계에 이르기 전에 우리나라는 국가로서의 존립 자체가 위협받게 될 것이라는 사실이다.

우리나라 저출산의 원인으로는 출산 장려를 위한 지원 제도의 미흡 등이 제기되고 우선적인 해결책도 거기에 기준한다. 그래서 선진국 가운데 출산율이 상대적으로 높은 프랑스처럼 출산수당등 각종지원제도의 확충이 해법으로 제시되고 있다. 그러나 출산율과 관련해서 먼저 성찰해야 할 것은 우리 사회의 기풍이다.

   오늘의 한국사회는 모든 분야에서 비생산적 기류가 팽배하다. 상징적으로 말하면 ‘불임(不姙)사회’인 셈이다. 정치판의 행태가 그렇고 경제상황과 사회기류도 마찬가지다. 개인-집단-지역- 세대-성별에 관계없이 공동체의 미래를 위해 화합-협력하는 생산적 기풍은 어느 곳에서도 찾기 어렵다.

  저출산도 바로 사회 기풍의 연장이다. 그때 그때 나만의 행복향유만으로 그만이라는 의식이 보편화됨에 따라 인간관계에서도 극도의 개인주의 혹은 이기주의 성향이 확산돼 왔다. 지금에 와서는 날로 더해가는 세태의 각박함이 개인으로 하여금 미래에 대한 희망을 잃어가게 하고 있다. 저출산은 거기서 연유한다.

   가정이라는 단위가 없다면 세계는 사실상 개인에게 무의미하다. 가정은 부모와 형제로부터 출발하여 친족으로 확대되고 그 관계의 총화가 인류다. 우리말에 유난히 친족호칭이 발달되어 있다는 것은 그만큼 ‘사랑의 공동체’를 소중하게 여겼다는 증명일 수 있다. 이모를 비롯한 정겨운 친족호칭이 되살아나는 세상을 만드는 것이 우리에게 부여된 시대적 소명의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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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시조(金翅鳥)는 인도신화에 나오는 상상의 새이고 무지개는 자연현상이다. 신화가 설명하는 금시조는 날개 길이 336리에 이르는 거대한 새다. 날개 색깔이 금빛이라고 해서 금시조로 불린다. 사람이 금시조의 형상을 보게 된다면 그것은 한순간의 몽환(夢幻)일 터이다. 공기 중의 수증기에 햇빛이 굴절, 반사해서 일곱가지 색깔로 나타나는 무지개 역시 일종의 허상(虛像)이다.

  금시조는 아무도 그것을 확인한 적이 없지만 신화는 그것의 존재를 말한다. 무지개는 실질(實質)이 없지만 우리 눈앞에서 뚜렷이 존재한다. 이처럼 신화의 세계에서만 존재하는 금시조와 과학의 영역인 무지개가 인간에게 알려주는 공통된 성징성은 무엇일까. 사람마다 해석이 다를 수 있지만 아마도 그것들이 갖는 상징성은 인간의 영원한 꿈이 아닐까 싶다. 달리 말하면 그것은 바로 거대한 희망이다.

   희망은 인간만이 갖는 특성이다. 오늘의 시련을 넘어서는 기본적 힘은 바로 내일을 향한 희망이다. 더구나 세상에는 희망을 예비하지 않는 고난이란 없는 법이다. 오늘까지 향유했던 삶의 양태, 혹은 애써 지켜왔던 가치체계가 온통 무너져내리는 듯한 불안이 세계를 휩쓰는 상황에서도 인류가 희망을 포기할 수 없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현세의 삶이 어려운 때일수록 종교의 역할은 비례해서 커진다. 종교의 역할이란 무엇인가. 한마디로 그것은 사람에게 희망을 안겨주는 것이다. 궁극적인 영생이거나 현세에서의 행복이거나 간에 그 출발은 마음속에 희망을 간직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의 행복이 종교가 추구하는 이상일지라도 그것을 현실에서 실질적으로 이룩할 수 있는 길은 오히려 정치에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종교가 사람들에게 제시하는 희망이 추상적인데 비해 공동체 구성원에게 구체적이고 직접적인 희망을 기약해 주는 것이 바로 정치이기 때문이다. 관행처럼 누적돼온 현실정치의 부정적 행태들을 근본적으로 바꿀 수 만 있다면 분명 그렇다.

  '희망사회를 향한 지도자의 역할'을 모색하기 위해 지난 1월 31일부터 2월 7일까지 미국 뉴욕과 워싱턴 지역에서 열린 ‘평화비전 21 세미나’에서 포괄적으로 제시된 주제는 ‘금시조의 꿈’이었다. 그것은 평화대사를 중심으로 한 새로운 도전을 의미한다. 그 도전이 현실정치라면, 앞으로 걸어 갈 길이 아무리 험로(險路)라 해도 뜻과 힘을 하나로 모아 헤쳐나가자는 다짐을 함께 한 것이다.

   미래에의 희망을 향한 금시조의 꿈을 공유하며 '그랜드 캐년'을 찾아보고 돌아서는 오후 시간에 일행의 시야에 홀연히 무지개가 잡혔다. 그것도 현란한 쌍무지개였다. 힘겨운 도전을 시작해야 하는 시점에 억만년의 신비를 간직한 대협곡에서 하늘에 떠오른 쌍무지개를 만나다니... 상징으로서 상서로운 징후가 아닐까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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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스라엘-팔레스타인 관계를 제대로 파악하기 위해서는 복안(複眼)의 시각이 필요하다. 갈등과 증오의 골이 그만큼 깊기 때문이다. 이번 이스라엘의 가자지역 폭격도 다르지 않다. 그만큼 사태의 원인과 책임을 한마디로 재단(裁斷)할 수가 없다.

   “내가 지금 살고 있는 집을 1500여년에 자기 조상이 살던 집이라면서 뺏으려 한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몽둥이를 들고 싸울 수밖에는...” 파레스타인과 그 무장단체인 하마스의 논리다. “집을 힘으로 빼앗겠다는 게 아니다. 선(先)도발을 그냥 놔 둘 수 없을 뿐...” 이스라엘 측의 가자폭격 논리다.

  물론 폭격의 양상이 참으로 참담하다. 폭격 시작이후 지금까지 가자에서 사망한 팔레스타인 사람은 950여명, 부상자는 4400여명에 이르고 이 가운데 어린이 사상자만 절반이 넘는다(1월 15일 현재). 사상자가 얼마나 더 늘어날지 가늠할 수 없는 상태다.외신으로 들어오는 어린이들의 ‘주검’ 사진이 너무 참혹해서 보도하지 못했다는 소식도 국내 언론사 안팍에서 들려오는 정도이다.

  폭격에 대한 국제여론의 비난에 대해서 이스라엘 군 당국의 변명을 완전 도외시하기도 어렵다. “가자 지역의 건물 1층엔 병원과 유치원이 있고, 그 지하층에 하마스 근거지가 있다”는 것이다. 어차피 ‘깨끗한(clean)전쟁’‘은 없다는 이스라엘 관료의 발언은 사태의 해결이 얼마나 지난(至難) 한지를 말해준다.

  미국의 역할에 기대하기도 어려운 상황이다. 국제문제에 대한 미국의 영향력이 현저하게 약화됐기 때문이다. 더구나 ‘변화’를 외친 오바마 차기 대통령의 주변에도 여전히 유대인들이 상당수 실세로 포진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따라서 이스라엘에 대한 비난에도 불구하고 이번 분쟁이 팔레스타인 측에 유리하게 끝나기는 어려워 보인다. 중동문제의 본질적 해결은 더 더구나 요원하다.

  냉전시대의 종언과 함께 ‘문명의 충돌’이 시작됐다는 것은 이미 세상이 다 아는 일이다. ‘9/11 테러’를 통해 세계는 전율할 문명충돌을 경험했다. 이번의 가자사태도 그 연장선상에 다름 아니다.

  분쟁의 궁국적인 해법은 결국 초종교 초국가 사상뿐이다. 그 구체적 실천 방안은 ‘다문화가정’의 빠른 확산과 보편화이다. 마틴 루서 킹 목사의 저 유명한 연설 “나에게는 꿈이 있다‘를 원용(援用)해서 말하면 결론은 이렇게 된다. ”언젠가 가자의 소녀와 예루살렘 소년이 사랑해서 결합하는 날이 오고 그런 일이 거듭 될 때 중동에는 진정한 평화의 꽃이 피어 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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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혁을 선도하는 도덕적 주체가 됩시다"

    우리는 지금 희망과 불안이 교차하는 속에서 또 다시 새해를 맞습니다. 희망은 우리가 일찍이 경험하지 않았던 새로운 변혁의 시대가 열릴 것이라는 기대에서 연유하고 불안은 지난해에 세계를 휩쓸었던 경제적 한파가 더욱 거세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입니다.    

  새해를 맞을 때마다 사람들은 예외 없이 지난해를 다사다난(多事多難)했던 것으로 기억하기 마련이지만 2008년은 특히 그러한 해였습니다. 미국에서 시작된 금융위기를 통해 공산주의 붕괴이후 세계가 발전과 번영을 위한 이념체계라고 여겨왔던 신자유주의는 결과적으로 허구였음을 여실히 드러냈습니다.

    지난해에 우리는 세계적 금융 위기 속에서 우리의 경제적 성취가 대단히 취약한 기반위에 있음을 절감했습니다. 더구나 그동안 향유해 왔던 물질적 풍요에 비례해서 도덕-윤리적 타락은 날로 심화되고 그 결과 불안과 불신의 기류가 팽배해지고 있음을 거듭 확인했습니다. 정치 경제 사회문화 등 모든 분야에서 꿈이 사라지고 있는 것입니다.   

  인류역사에는 항상 고통 속에 교훈이 함께 합니다. 전쟁이 평화의 소중함을 일깨우듯이 지금 세계가 함께 겪고 있는 어려움에도 분명한 깨우침이 있습니다. 그것은 오늘의 시대에는 어느 때 보다도 국가 종교 인종 등의 차이를 넘어 협력과 화합이 절실히 요구된다는 점입니다. 세계적 경제 위기가 인류에게 전하는 교훈이 바로 그것입니다. 어떤 나라, 어느 민족, 특정 종교 하나 만으로는 오늘의 위기를 극복할 수 없고 세계 평화와 인류의 구원도 요원하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가르쳐 준 것입니다. 문선명 총재께서 초종교ㆍ초국가ㆍ초인종의 ‘뜻 길’을 가기위해 그동안 추진해온 평화대사 운동의 ‘참뜻’이 이제 더욱 확연해지는 이유도 그 때문입니다.  

   우리나라를 비롯해서 전 세계 200여개 나라에서 활약 중인 평화대사들이 지난해에 문 총재께서 겪으신 헬기 사고를 통해 확인한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다름 아니라 기적의 형태로 드러낸 섭리일 것입니다. 따라서 이제 평화 운동의 적극적인 실천은 사람의 몫이고 그 책임의 맨 앞줄에 우리 평화 대사들이 서 있는 것입니다. 그와 같은 인식으로 이제 우리 모두가 공감하고 합의해야 할 것은 변혁을 위해서는 ‘더불어 사는 삶’, '위하는 삶' - 다시 말해 공생(共生)의 이념을 최고의 가치로 삼아 그것을 함께 실천해 가야한다는 사실입니다.  

   공생을 위한 변혁의 출발은 바로 다문화의 확산이고 그렇게 해서 종내에는 다문화가 세계적으로 보편화돼야 합니다. 미국에서 오바마 대통령의 등장은 그 필연성을 강하게 시사합니다. 오바마 새 대통령은 출신 배경으로 볼 때 미국 역사상 최초로 ‘다문화 리더십’을 극적으로, 그리고 명료하게 상징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경우를 되돌아보면  건국 후 산업화를 거쳐 민주화의 성취까지 60여년의 현대사는 말 그대로 갈등 속에 이어진 땀과 눈물의 역사였습니다. 건국 시기에는 민족진영 인사들이, 산업화 시대에는 근로자들이, 민주화 과정에서는 학생들이 때마다 갈등의 시대를 청산하고 변혁을 도모하기 위해 그렇게 고통을 감내했습니다. 꿈을 잃어가는 오늘의 시대에는 누가 우리의 꿈을 다시 복원하고 평화를 위한 변혁의 역사(役事)를 누가 맡아야 하겠습니까.

    변혁은 그것을 선도할 새로운 도덕적 리더십이 필수적인 선행요건입니다. 지금 한국 사회야말로 그와 같은 명제가 절실하게 제기되는 상황입니다. 따라서 새해에는 평화대사 여러분이 사회의 그늘진 곳에 더욱 깊숙이 들어가 희생과 봉사로 나라발전과 세계평화를 위해 변혁을 선도하는 도덕적 주체가 되어 주시길 바라마지 않습니다. ‘잠바차림에 국밥을 함께 먹으며 현장 속에서 봉사로 평화를 심자”를 삼가 새해의 화두(話頭)로  제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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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시 한 해를 마감해야 하는 12월이다. 해마다 이 맘 때면 여기저기서 망년회가 열린다. 이제 사회적 관행으로 굳어진 망년회에서 참석자들은 빠짐없이 '위하여'라는 건배사를 외치기 마련이다. 그 ‘위하여’의 함의(含意)는 힘들었던 한해를 잊어버리자는 다짐일 수 있고 새로운 출발의 기약일 수도 있다. 모두 좋은 일이지만 한번쯤 겸허하게 짚어 볼 일이 있다.

  과연 우리의 '위하여'는 누구를 향한 건배사인가. 아마도 ‘나- 우리-우리 회사 등을 위하여’-라는 지극히 자기중심적이거나 이기적인 소망을 은연중에 표출하는 것은 아닌지. 적어도 올해의 망년회 자리에서는 그런 건배사의 심리가 달라졌으면 한다. 나와 우리가 아닌 고통 받는 이웃을 위한 ‘나눔의 다짐’이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우리의 삶에서 나눔은 가장 큰 기쁨의 하나임을 록펠러의 일화가 잘 말해준다. 43세에 미국의 최고 부자, 53세에 세계 최대 갑부가 되었던 록펠러는 55세 때에 1년 이상 살지 못한다는 불치병 선고를 받았다. 어느 날 최후 검진을 위해 휠체어를 타고 병원을 들어서는 그의 눈에 로비에 걸린 액자의 글이 들어왔다. “주는 자가 받는 자보다 복이 있다”. 그 글을 읽은 순간 마음속에 까닭모를 전율이 일었다. 섬광과 같은 깨달음이었다.

  때마침 입원 보증금이 없는 환자 가족이 병원 직원 앞에 울면서 선처를 호소하고 있었다. 록펠러는 그 자리에서 환자 가족 몰래 입원비를 대신 지불토록 했다. 그렇게 은밀히 도운 소녀가 기적적으로 회복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던 순간을 록펠러는 자서전에서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나는 살면서 이처럼 행복한 삶이 있는 줄 몰랐다”. 그는 98세까지 장수했다. 부의 사회 환원이라든가 자선문화 등 미국적 미덕은 록펠러와 같은 선각자들에 의해 전통으로 다져진 것이다. 

  부자만이 나눔을 실천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어려운 시대일수록 작은 나눔의 실천이 관행으로 확산되면 그 총화는 사회적 구원이 된다. 평화대사 운동의 창시자인 문선명 총재는 인간과 사물의 존재의미를 ‘위하여 사는 삶’으로 규정하고 내가 먼저 상대를 위하지 않으면 결국 단절에 의해 소멸로 귀결된다고 했다. 사회와 역사 발전의 궁극적 법칙은 ‘위하는 삶’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의 망년회 건배사가 나눔의 실천을 다짐하는 ‘위하여’가 되기를 기대하는 이유다.

Posted by 평화행동

  ‘국민의 애인’으로 불리던 한 인기 여배우의 자살은 그 원인과 동기 등에 대한 사회적 논란 못지않게 ‘생명은 누구의 것인가’라는 근원적인 성찰의 필요성도 제기한다. 반드시 종교적 관점이 아니더라도 개인마다 ‘생명의 소유권’에 대한 겸허한 성찰 없이는 오늘과 같은 자살만연 풍조를 해명하기도, 해결하기도 어렵기 때문이다.  

  인간의 생명은 단순히 육신(肉身)일 뿐이라고만 보아도 그 소중함의 무게가 어느 정도인가는 성현 공자의 말씀이 명료하게 설명해 준다. “몸과 피부와 머리카락은 모두 부모로부터 받은 것이니 감히 이를 손상시키지 않는 것이 효도의 시작이다”(身體髮膚 受之父母 不敢毁傷 孝之始也)라는 ‘효경’(孝經) 첫째장의 문구가 바로 그것이다. 물론 이 말은 유교의 핵심 덕목인 효의 실천방법을 깨우치기 위한 것이지만 인간 생명의 본질적 소중함에 대한 가르침이기도 하다. 

  생각해 보면 우리의 생명은 무엇보다 사람과의 ‘관계’로써 생성되어 존재하다가 소멸한다. 부모와 형제와 자식 그리고 수많은 이웃 등과 관계 지워진 상태에서 그 실존의 의미가 확보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사람은 자기 생명의 존재의미를 이와 같은 관계로 파악해야 하는 숙명을 안고 살아 갈 수밖에 없다.

  만인의 사랑을 받는 인기인의 경우, 말하자면 그 관계의 폭이 그 유명도에 따라 불특정 다수로 확대된다. 이를 거꾸로 보면 자기 생명을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결정권이 비례해서 끝없이 축소된다는 뜻이다. 한 여배우의 자살에 대해 원로 배우 한분이 조심스럽게 토로한 말이 이를 잘 말해준다. 그 원로배우는 “생명은 자기 자신만의 것이 아니다. 특히 배우의 생명은 더욱 그렇다. 국민들의 것이다" 며 안타까워했다는 보도가 있었다. 

  세상이 다 아는 일이지만 자살은 종교적으로 큰 죄악이다. 왜 인가. 생명은 신의 피조물이고 자살은 신의 창조행위에 대한 거역이기 때문일 뿐인가. 물론 그것도 진실이지만 세속적으로 보면 자살은 ‘사랑’에 대한 돌이킬 수없는 배반이고 단절이기 때문이 아닐까. 무엇보다도 가장 원초적인 사랑의 관계로 맺어진 부모 형제 자식에게 씻을 길 없는 슬픔을 안겨 준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생명은 결코 나만의 것이 아니다.

Posted by 평화행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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